고래가 춤을 춘다.

by 하루

고래가 춤을 춘다. 그것도 서울 도심 한 복판 사거리에서. 이미 유명해져 안 본 사람 별로 없을 것 같은 디지털 아트 영상을 철도 한참이나 지나 뒤늦게 유튜브로 넋을 잃고 보고 있다. 현장에서 영상을 봤더라면 운전하던 차를 세우고 길에 나가 디지털 전광판을 한참 올려다보지 않았을까 싶게 쿨하다. 여름날 더운 도심 하늘에 솜사탕처럼 둥실 떠 있는 고래라니 Cool하지 않을 수 없다. 영상 속 고래는 넓은 수족관 안을 유유히 돌며 도심을 누빈다. 비록 큰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수족관 안을 맴도는 처지지만 고래는 고래라 아름답다. 매일 그 길로 밥을 벌러 다니면서도 멋진 쇼, 하늘을 유영하는 거대한 유기체의 우아한 춤을 직관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요즘은 수족관 속 우아한 고래 대신 여배우의 아름다운 얼굴을 본다. (신기하게 이 광고에도 고래가 나온다.) 싱그러운 풀밭과 총천연색 꽃밭을 누비던 여인이 묻는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글쎄… 오 드 퍼퓸을 뿌려야 하나? 출, 퇴근하는 아침, 저녁, 가끔 주말 오후 그 사거리를 동서로 남북으로 지나며, 전광판 격전지답게 하루도 쉬는 법 없이 부지런히 화려하게 발광하는 큰 네모들 속 광고를 본다.(왜 세모나 동그라미, 육각형, 타원형 전광판은 볼 수 없을까?) 화장품, 시계, 스포츠웨어, 아이돌 새 앨범, 백화점 세일, 배달앱, 호텔 로비, 새로 하는 드라마, 뮤지컬… 혼을 훔쳐 가려는 화면들이 내 눈을 붙들어 매고 속삭인다. “이렇게 멋진데 안 사고 뭐해? 이 걸 사면 너도 그만큼 멋져질 텐데, 근사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그냥 지나치면 후회할 걸” 신호 대기에 걸려 잠시 멈춤 상태로 사거리에 있다 보면, 발광체와 그 빛에 물든 유리 건물들에 둘러 싸여 마치 여기가 아닌 저기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는 통로로 들어서는 듯한 착각이 든다.(SF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떠올린다.) 초록 불이 들어오면 차를 탄 채 붕 떠올라 화면 속으로 슝!(백 투 더 퓨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정신 차려. 초록불이야. 출발하자. 그 발광체가 내 뇌를 마취시켜 일시적으로 감각이 마비되는 건지 모른다. 아니면 정 반대로 마약처럼 과잉 활성화시키는 건지도. 다른 건 생각하지 마. 거기 있지 말고 멋진 이 쪽 세계로 넘어와. 다행히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고 얼른 그곳을 빠져나온다.


사무실에 올라가려고 건물 엘리베이터를 탄다. 거기에 또 작은 전광판이 돌아간다. 이번엔 비건 샴푸다. 두 연인이 서로의 젖은 머릿결을 보며 말한다. “이 샴푸로 감으니 머릿결이 꼭 물미역 같아졌어”. 겨울 마른땅처럼 푸석푸석한 내 머릿결을 만지작거린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사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나는 고래다. 사소한 낚시질에 낚이는 붕어가 아니란 말이다.’ 어림없지.... 주말 아침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자꾸 눈이 간다. 물미역 같은 머릿결은 어떤 거래. 2주 전 파마를 하러 갔을 때 헤어디자이너의 마지막 인사가 떠오른다. “머리카락에 단백질이 부족해 보이니 조만간 관리하러 오세요.” 미용실로 전화를 걸고 10시에 예약을 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주인이 쓸 것 같은 헬멧 모양의 스팀 나오는 플라스틱 공 안에 머리가 들어가 있다. 낚였다. 붕어다.


영화 비포 선셋의 Le Pure Cafe장면이 생각난다. 셀린이 십 대 때 아직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유럽에서 몇 주간 머물렀던 경험을 얘기하는 씬. TV에서 나오는 말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살 것도 광고도 없는 우울한 회색 빛 도시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 습관이 바뀌며 자기 뇌가 어느 순간부터 더 선명하게 맑아졌던 경험을. 달리 할 일이 없는 시간 산책하고 쓰고 그동안 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하며 영혼이 평화로워지는 느낌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맞아 그럴지도 모른다. 뇌가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늘 피곤한 것은 수많은 외부의 발광체들이 보내는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 내 뇌가 끊임없이 반응하는 까닭이다. 외부의 신호를 꺼 버리는 그래서 내 뇌의 수동적인 반응을 잠재우는 능동적 시도가 필요하다. 서울은 공산주의 시절 바르샤바가 아니므로 범람하는 광고의 홍수를 혼자 틀어막을 재간이 없다. 사거리에도 있고 엘리베이터, 버스, TV, 상점, 휴대폰 어디에나 차고 넘쳐 말 그대로 홍수다. 이대로 쓰나미가 되도록 떠밀려 가야 하나. 무심히 그 도도한 물결이 내 안을 침수시키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 각. 을 한다. 작은 결심 하나. 설 연휴 5일 동안 하루나 이틀 사지 않고 지내보자. 사실 그 오 드 퍼퓸을 뿌린다고 사랑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란 걸 알잖아. 외부의 신호를 끄고 나면 내 안에 작은 귤 색 등불이 하나 켜질지 모를 일이니 이번엔 하루 그다음엔 이, 삼일 일주일 한 달. 그렇게 광고를 보느라 쏟은 시간과 돈을 모아 전광판 속 고래가 아닌 진짜 고래를 보러 큰 바다로 나가 보자고, 일단, 하루 처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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