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그 달콤 쌉쌀함에 대하여

by 하루

낮게 내려앉아 마음까지 짙은 잿빛으로 물들일 것 같은 하늘을 나른한 눈으로 흘끔거리던 토요일 오후. 책상머리에 앉아 100년 후 미래를 예측하는(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에게 과한 욕망이다 싶은) 책을 한 시간쯤 읽고 있자니 잠이 별빛 내리 듯 쏟아져 내린다. 나는 과 부하에 걸린 CPU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변변찮은 하드웨어를 책상 옆 침대로 보낸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다디단 잠이었다. 잠들기 전 아직 하얀 이불 홑청처럼 환하게 남아 있다 했는데, 늦겨울 오후 해는 느닷없이 짧아져 벌써 뉘엿거린다.


분명 요사이 누려보지 못한 달콤한 잠이었는데, 깨어난 후 한참이나 내 기분을 끌어내리며 남아 있는 이 뒷 맛은 뭘까. 우울이라기보다 슬픔의 발치에 닿아 있는 것 같은 쌉싸름한 맛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쉬고 싶던 토요일 그 저녁엔 생각을 접어 두었다. 생각이란 게 그렇다. 꼭 하지 않아도 살아지는 생각이 있어서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굳이 시간 들여 곰곰이 노려보지 않는다. 부러 허공에 날려 잊어버리거나 심해 밑에 묻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조심하거나. 생각은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지대한 노력이 필요한 지난한 일인지. 일생 면벽하며 해도 해도 닿기 어려운 것이 생각의 끝이라 그 걸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자칫 깊은 생각의 수렁에 빠졌다 낭패 보기 십상이란 얇은 계산이 앞에 서 있다. 그럼에도 두어 주가 가는 동안 그 오후 쌉쌀한 낮잠의 기억은 날아가지도 묻히지도 않아 생각이 다시 곰곰해졌다.


"이 세상은 신들과 괴물과 영웅의 세계가 아니고, 날개 달린 영혼이 고요한 에테르 속으로 비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가까운 것, 낮은 것, 평범한 것, 불완전한 것들의 세계다. 이 불완전함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천국이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천국을 발견해 내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사이먼 크리츨리/그저 존재하는 것들


철학자는 세상이 신들의 세계가 아니라 했어도 신화 속 이야기에는 종종 삶의 진실이 담겨 있곤 한다.

히프노스는 타나토스와 형제다. 잠의 신과 죽음의 신을 형제지간으로 맺어 둔 것은 고대 그리스 인들이 죽음을 영원한 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잠은 작은 죽음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깨어 있는 동안 살면서 동시에 조금씩 죽지만 잠이야 말로 죽음과 가장 유사한 삶의 시간이다. 우리는 죽음을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손님처럼 대하지만, 사실 매일 잠처럼 우리를 찾아오는 친구인 걸 알고 있다. 짐짓 모른 척하고 싶을 뿐.


밤으로부터 아침까지 이어지는 잠은 영원한 잠은 아니지만 완전한 잠이다. 작은 죽음으로 인정받는 잠이다. 다시 시작하는 부활의 잠이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 완결된 것은 미련을 남기거나 종종거리게 만들지 않는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밤잠은 매일의 그 완결성으로 인해 작은 죽음을 오히려 삶으로 편입시키며 죽음의 이물감을 삶과 상쇄시켜 없앤다. 우리는 매일 아침 부활하며 죽음의 시간을 잊는다.

낮잠이 남기는 슬픔은 불완전함에서 온다. 낮인지 아침인지 모호한 가운데 깨어나는 정신은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도 밤이 가까이 있어 초조해진다. 짧은 잠은 긴 잠 보다 달콤하지만 죽음의 이물감을 미처 상쇄시키지 못하고 달콤한 만큼 강렬하게 상기시킨다. 죽음이 삶의 완결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낮잠이 슬픈 거다.


죽음으로 완전해지는 삶이니 그 과정은 온전히 낮잠만큼이나 불완전하다. 불완전하다고 삶이 꼭 슬픔으로 가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낮잠이 주는 슬픔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고(생각해 알아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며 달콤함을 즐기기로 한다면, 불완전함 그 자체보다 그것이 주는 가능성에 더 집중한다면 이 불완전함 속에서 천국을 발견해 내는 그 어려운 일을 해 낼 수도 있으리라. 천국은 가까운 것, 낮은 것, 평범한 것, 불완전한 것들 속에 숨어 있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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