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행방

마흔 번째 봄

by 하루

딸아이가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린다. "재밌어?" 휴대폰 화면의 대화를 읽어 준다.


"이모는 커서 뭐 될 거야?" "이모는 다 컸어." "그럼, 이모는 뭐 된 거야?" @@


요즘 유행하는 유머인가 보다. 유머는 내 삶에 밥만큼이나 고프고 필수불가결하지만 이 유머에 함께 웃으면서도 뜨끔해졌던 건 비밀, 대답이 궁색하다.

'그러게, 다 커서 이제 뭐가 된 거니?' '아니, 아직 덜 큰 건지 모르지'


내겐 좀 쓸데없는 버릇들이 있을 텐데 그중 하나가 누군가의 나이와 나의 전 생애에 걸친 나이를 비교하는 버릇이다. 예를 들면, 어느 작가의 작품을 읽다가 참 잘 썼다 싶으면 이걸 몇 살에 썼나 굳이 찾아보고는 마흔여섯에 난 뭘 하고 있었지 더듬어 보는 것. 어느 과학자가 상을 받았다더라 하는 기사에는 꼭 이름 옆 괄호 안에 친절하게 나이가 적혀 있다.(가끔 성별도) 그럼 또 거슬러 올라가 본다. 난 서른아홉에 뭘 하고 있었나. 벤처기업(그것도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회사를)을 세워 성공한 CEO의 팔짱 낀 멀끔한 프로필 사진을 보다가. 7년 전 첫 번째 회사를 세웠다고? 셈을 해 본다. 흠.. 난 스물넷 엔....


마흔여섯, 서른아홉, 스물넷에도 뭔가 되기 위해 착실히 시간을 보내고 차곡차곡 시간을 쌓았을 테다. 스물엔 어렴풋이 어떤 인생의 모습을 기대했고, 서른에 기대 비슷한 모습이다 싶었을 땐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하고 마흔의 다른 모습을 그렸다. 어찌어찌 별 이변 없이 당도한 마흔 언저리. 낡은 장난감에 흥미를 잃어버리듯 이 산이 그 산은 아닌가 싶어지고 또 새로운 뭔가를 갈구하곤 했다. 뭔가가 되기 위한 목표 의식이 희박했거나 아님 되고 싶은 특정한 뭔가가 아예 없었거나. 딱히 내놓을 만한 번듯한 목표를 가지지 못해 늘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도달한 듯한 이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와 행방이 묘연한 내 시간을 비교해 보며 풀 죽어하곤 했나 보다. 그 나이면 이 정도의 성장은, 이 나이면 그만한 결과는 보여줘야 되는 거 아냐? 스스로에게 지금쯤이면 뭐라도 되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노잣돈처럼 꼬박꼬박 챙겨 보낸 세월의 무게와 값을 따지 듯 물었던 게 아닐까.


그래.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로서의 목표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던 걸 그냥 인정하자.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다. 이제 그만 묘연한 지난 시간의 행방을 찾아 헤매느라 애쓰지 말고 상관없는 남의 시간과 비교하며 내 시간을 골 내며 보내지 말기로 하자. 숫자와 상장과 이름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말고 진짜 뭐가 됐는지 살아 있는 지금 어떻게 알겠는가. 깜깜한 망망대해 작은 등대 불빛, 북극성 별빛 길잡이 삼아, 겨우겨우 나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넌 뭐가 됐어?"라는 물음은 온 존재로 답해야 하는 물음이라 끝의 날이 올 때까지 답을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질문이다. 그래도 굳이 답을 구한다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까만 밤 내내 한 편의 시가 별빛이 되어 줄 수도 있으리라.




마흔 번째 봄

함민복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꽃 지는 봄 산처럼

꽃 진 봄 산처럼


나는 누군가의 가슴

한번 울렁여 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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