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 보자 팔짝.

소년아!

by 하루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닥치기 전 이 사태가 길어질 거라는 예측을 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서너 달이면 끝날 줄 알았다.), 앙증맞고 다부진 접이식 미니밸로 자전거를 두대 샀다.(혼자는 심심해.)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초록색 바디를 접었다 폈다 할 때 시, 촉각의 쾌감이 아날로그식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멋진 걸로.


나는 자전거를 잘 못 탄다. 스무 살에 처음 자전거 안장에 올랐으니 다 커서 탄 자전거가 영 몸에 익어지지 않았는데 서툰 실력에 내리막 길을 내려오다 제어를 못하고 반 바퀴 돌고 낙하한 후 자전거 타기를 그만뒀다. 서른 즈음 경포대에 놀러 가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빌린 자전거로 비틀비틀 몇 바퀴 돌고는 그 후로 탈 일이 없었다. 마흔 즈음 친구들과 놀러 가 어울려 자전거를 타며 약간의 자신감을 얻은 후 회사 동료들과 양평 자전거 야유회에 참석해 옛 철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 옆으로 넘어져 얼굴에 찰과상을 입고 그만두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전거를 향한 내 짝사랑은 십 년 단위로 질척거리며 계속되고 있는 모양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적지 않은 지출을 불사하고 넘어진 기억으로 생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사실 , 아직 극복한 건 아니다.) 다섯 번째 십 년을 넘기는 무렵 첫 번째 자전거를 샀을까. 아마도 그 건 눈 때문이다. 그즈음 급격한 시간의 타격을 맞고 있던 시력 탓이다. 지나 온 시간이 그동안 밀린 사용료를 갚으라고 맨 먼저 눈에게 비용을 청구했다. 책 읽는 것도 안경의 도움을 받게 되니 가만히 앉아 오래 많이 읽기는 점점 어려워지겠군. 움직여야겠어. 이제 줄줄이 오십 년 묵힌 청구서가 날아들 텐데. 걱정이 들 던 그때 광고 카피처럼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더 늦기 전 좀 잘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 건 자전거 타기다. 생각의 전구에 반짝 불이 켜졌다.


실내에 모여 운동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바람 좋은 날이면 근처 한강변, 양재천, 시내길을 자전거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주말 하루 좀 멀리 다녀와 볼까 하고 왕복 25km 목표로 마포대교를 찍고 돌아오는 길. 엄청난 한강변 라이더 인파 속에 언덕길을 오르려 힘주어 갑자기 속도를 낸 순간 균형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져 엎어져버렸다. 얼굴, 어깨, 팔꿈치, 골반, 무릎 할 것 없이 상처가 심하게 나 이후 몇 개월 자전거는 거실 한쪽에 접힌 채 새 주인을 기다리며 내놓은 중고 가구 마냥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같이 타러 나가 내 뒤에서 달리다 봉변을 당한 남편은 시간이 좀 지난 어느 날 어린이용 팔꿈치, 무릎 보호대를 주문해 주었다. 아~ 어른이 되어서도 자전거 타기는 아이 때 배우는 방식으로 배워야 하는구나. 어떤 것들은 어른이 되어 배운다고 더 쉬워지거나(더 어렵기 일쑤다.) 그냥 건너뛰어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남해로 여행을 가 오랜만에 자전거를 펴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늦여름 이른 아침 인적 드문 바닷가 마을을 짭조름한 바닷바람 맞으며 달릴 때, 한 번도 소년이었던 적 없지만 소년이라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했다. 왜 소녀가 아니고 소년의 기분이라 하고 싶을까 잘 모르겠다. 두발로 페달을 꾹꾹 밟으며 달리면 몸은 점점 중력의 손아귀를 벗어나 날아갈 것 같고(E.T. 의 명장면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바람이 머리칼과 뺨을 스치고 사라져 갈 때 소년이 내게 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허접한 문장력으로 표현해 낼 수 없으니 의기소침해진다. 한참을 달린 후 자전거에서 내려오면 뜨끈해진 발바닥이 간질거리며 팔짝팔짝 뛰어오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아직 덜 달렸나 보다. 기진맥진 쓰러질 만큼 달리지 않은 거지. 그러면 어떤가. 뛰어보자 팔짝. 아이야! 소년아! 그대로도 신나. 그리고 또다시 힘껏 페달을 밟아보자. 다음엔 조금만 더 멀리 가보기로 욕심부리지 말고. 왼쪽 팔꿈치에 도드라져 나 있는 상처 자국을 매만진다. 이번엔 또다시 십 년을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짝사랑을 끝내야겠어. 내 안의 아이를 꺼내 팔짝 뛰게 만드는, 그 소년을 신나게 자유롭게 달리게 해 줄 자전거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오래 조심조심 달려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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