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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사람 Aug 08. 2020

내 청춘과 열정이 묻어있는 곳

비행기에서 내리자 숨이 턱 막힐 듯한  뜨거운 공기가 드디어 중동 땅에 떨어졌음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9월의 중동은 그렇게나 더웠다. 출국일을 기다리는 동안 합격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다음 카페에는 온갖 소문들이 무성했다. ‘숙소가 너무 후지고 더럽다. 바퀴벌레가 나온다. 두 달 먼저 입사한 1기들이 숙소 때문에 힘들어서 그곳에 간 것을 후회하고 있다.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한 달 가까이 회사에선 아무런 조치가 없다.…’ 너무 걱정을 하고 간 터라 막상 도착해서 봤을 때는 높은 천장과 넓은 거실에 방 2개 욕실 2개가 있는 숙소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에서도 그렇게 천장이 높은 집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내가 살게 될 숙소의 이름은 ‘토요타 어카머데이션(Toyota Accomodation)’이었다. 숙소 바로 앞에 토요타 자동차 전시회장이 있어서 그 건물을 그렇게 불렀다.      


첫 트레이닝을 받았던 한 달 동안은 매일이 벅참과 설렘의 시간들이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삶을 부러워만 했던 내가 그토록 원했던 곳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니 감격스러운 마음과 뿌듯함으로 일상이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했다.      

종교가 국민들의 삶과 생활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중동의 문화와 국민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슬람교에 관한 수업을 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태어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성지순례를 위해 모여든 수천 명의 인파가 다함께 기도를 하는 영상을 볼 때는 신비스러움이 느껴졌다. 이슬람교의 율법은 엄격하고 실제로 무슬림(이슬람교도)인 동료들이 근무시간을 포함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러 간다거나, 라마단 기간에 (매년 한 달동안 해 뜰 무렵부터 해 질녘까지 금식을 하는 이슬람의 종교의식) 철저하게 금식을 하는 행위를 옆에서 보면서 종교는 그들의 삶인 것을 알게 되었다.     


열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중동의 부자나라. 인구의 90%가 외국인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그곳은 세계각지에서 그들의 꿈과 돈. 욕망을 쫓아 몰려든 사람들의 도가니였다. 그곳에서 살게 될 거라고 말하자 “왕의 몇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서 편히 살면 되겠네, 돈 많이 벌어서 좋겠네” 등 듣는 말들도 여러 가지였다. 막상 내가 처음 접한 중동땅은 온통 공사중이었다. 숙소앞도 공사 중 숙소 뒤도 공사중.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 온 까만 외국인노동자들이 45도 가까이 되는 뜨거운 뙤약볕아래서 곧 쓰러질 것 같은 비쩍 마른 몸으로 하루 종일 망치질을 해댔다. 십 분밖에 안 걸리는 동네 수퍼마켓에 가는 길에는 그 까만 노동자들의 시선을 그대로 받았다. 그들은 아시아 여자들을 흘끔 쳐다보지 않고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석유와 천연가스가 넘쳐나는 나라니 택시 값도 싸겠거니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택시를 잡으려고 길에 서있으면 프라이빗 택시기사들의 호객행위가 계속 되었다. 프라이빗 택시는 그들이 부르는 게 값이었고 불법이기에 어떤 사고가 나도 보호를 받지 못한다.     


출국날짜가 같다는 이유로 서른네 살의 나와 나보다 열한 살이 적은 민지와 지은. 그리고 그들보다 두 살이 많은 주연은 같은 숙소로 배정을 받았다. 초반에는 아홉 명 정도 되었던 우리 기수들이 대체로 함께 움직였다. 우리 넷도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를 의지했고 트레이닝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한국의 TV 프로그램을 함께 보고 밥도 같이 먹으며 가까이 지냈다. 


외국에 나가 살게 되면 한국인들은 끼리끼리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사소한 일로 빠르게 멀어진다. 영국에서 홈스테이를 했던 한 달을 제외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늘 방을 혼자 썼던 나는 여러 명과 한집에서 함께 생활을 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서로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공동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수칙에 대해서 의식을 못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습관적으로 해오던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큰 스트레스가 될 줄은 몰랐다. 밤 근무가 끝나고 새벽에 퇴근을 해서 샤워를 한 후 항상 해오던 것처럼 헤어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고, 내 물건을 어지럽히지만 않으면 매일 쓸고 닦고 청소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새벽에 헤어 드라이어 소리가 룸메이트들이 잠을 자고 있는 방까지 새어 들어가 누군가의 잠을 깨운다거나, 매일 쓸고 닦고 청소를 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며칠에 한번씩 청소를 하는 것이 얼마나 책잡힐 일이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형제자매나 부부사이도 한집에 살면서 싸울 일이 있는데 자기만의 생활방식이 굳어진 전혀 다르게 살아온 성인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한집에 부대끼며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쯤에 위층에 살던 다른 기수들이 말다툼을 하다 심하게 치고받고 싸웠다는 얘기도 들려왔고, 누군가는 퇴사날짜를 받아놓고 함께 살던 룸메이트에게 소심한 앙갚음을 하고 숙소에서 나와 잠적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하루 10시간동안의 근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도 맘 편히 쉴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때 즘에 규리라는 아이를 알게 되었다. 영국에서 2년을 살다왔다는 규리는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는데 당차고 유쾌했다. 나름 영국식 발음이 묻어난 영어를 했고 말도 재미있게 잘해서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그나마 또래여서 그랬을까. 대화를 할 수 있는 동료가 생겨서 숨통이 좀 트이는 듯했다. 공항에서도 늘 붙어 다녔고 오전근무가 끝나고 퇴근을 하면 함께  이곳저곳을 놀러 다녔다. 도심에서 40분쯤 택시를 타고 나가면 파란 바다빛깔이 너무나 아름다운 해변이 나오는데 한적한 해변을 거니는것만으로도 해방된 느낌이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에서 마셨던 카푸치노와, 바다소금을 그대로 한 움큼 퍼다 넣은 듯 짜디짠 카르보나라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가장 좋았던 시간은 규리와 어느 호텔에 있는 재즈바에서 함께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때였다. 사우스아프리카에서 온 여가수가 허스키한 음색으로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발레리’를 불렀다. 규리가 좋아하는 영국의 여가수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도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발레리’란 곡을 좋아하게 됐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을 때면 그 장소와 시간들이 떠오른다. 일상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규리는 6개월을 일하고 첫 휴가를 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연락이 끊겼다.    

1년이 지나니 룸메이트 세 명과 동기 기수들이 하나 둘씩 모두 한국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한국인 이지가 내 룸메이트로 들어왔고 튀니지에서 온 모나와 수단에서 온 한나와 함께 숙소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지는 나처럼 자기 물건을 어지럽히지 않고 며칠에 한번씩 청소를 했다. 서로 부딪힐 일이 없이 우리는 나름 평화로운 숙소생활을 했다.      

        

가끔 TV에서 방송되는 이슬람 국가(IS)에 관한 뉴스를 볼 때면 내가 사랑했던 동료들이 그곳에 있고, 또 내가 그곳에 발 딛고 있을 때나 중동은 가깝고 애틋한 곳이지 멀리 떨어져 있으니 기이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청춘과 열정이 온전히 묻어있는 곳. 그곳에는 우리 모두의 꿈이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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