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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민 Nov 16. 2023

중환자실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가는 길, 일요일 저녁 올림픽대로의 답답함 만큼 우리 마음도 답답했다. 


남편은 이틀 전에 아버지를 만나고 왔다. 나와 아버지가 투닥거린 일로 착한 남편이 중재를 하러 갔던 자리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꽤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성공적 대화의 결과로 아버지와 나는 "아버지 죄송해요", "아니다. 나도 미안해 며느리" 하며 대화를 시작해 "다음에 맛있는 저녁 먹어요.", "그래 아버지가 맛있는 거 사줄게"로 마무리되는 통화를 했다. 남편은 아버지를 한번 안아드리고, 또 뵈어요- 하고 기분 좋게 돌아왔다. 남편은 후에 이 일을 두고,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그 투닥거림이 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던지. 


가는 길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뇌출혈로 쓰러지신 아버지의 위중함을 알리며, 수술을 한다고 해도 나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자식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 더 큰 병원으로 갈 수 있는지 물어보니 좀 더 알아보겠다고 했고, 다시 연락이 와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길 수 있다고 했다. 여지없이 전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바로 병원에 도착했다.


20년 전 배를 타다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착용하시던 아버지였다. 의족이 없는 모습으로, 너무 마른 모습으로, 너무 많은 기기를 부착하고 누워계신 아버지를 처음에는 못 알아봤다. 마음도 손도 떨렸지만, 아직은 울고불고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자. 마음을 붙잡고 수납을 했다. 보호자 한 명이 응급차에 타야 한다는 말에 난생처음 응급차를 탔다. 


응급차는 거의 200km/h에 가까운 속도로 달렸던 것 같다(사실과 다를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에서 부른 사설 응급차가 뇌출혈로 수술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환자에게 적합한 이동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어차피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해도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니, 속도보다는 안정적으로 옮겨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래도 (덕분에) 병원에 빨리 도착해, 또 상당히 많은 기계를 온몸에 연결하고, MRI를 찍으러 갔다. 세상에 위급한 사람이 우리뿐이랴... 대기하는 시간이 꽤 길었다. 아니면 그저 길게 느껴진 것일 수도. 


병원으로 아버지의 형제분들이 도착했다. 아버지는 아래 남동생 2, 여동생 1 있는 4남매 중의 맏이였다. 동생분들 내외 6, 우리, 같이 사는 분, 그의 아들 총 10명이 황망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상황을 기다렸다. 대학병원 교수는 어느 정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전원을 받아들였지만, 다시 와서 여러 검사를 해보니 출혈량도 많고 출혈 부위도 좋지 않아서 수술을 한다고 해도 다시 걷거나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시는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그래서, 수술을 할지 말지를 가족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첫 병원에 가는 길에 들은 말과 동일했다. 그럼 전원을 왜 했는가... 답답했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같이 사시는 분은 하염없이 울었고, 작은 아버지들은 우선 아들인 남편에게 결정하라고 했다. 남편이 어렵다고 하자, 작은 아버지는 어른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일 것에 대해 말씀해 주었다. 머리로는 알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앞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고 있을때, 담당 의사 선생님이 우리가 모여있는 로비로 오셨다. 


다시 한번 가족 모두가 듣는 앞에서 아버지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고, 결정을 내릴 때 가족들이 들 수 있는 죄책감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셨고, 본인이 더 미안해하시면서 정중히 결정을 요청하셨다. 수술여부에 대해, 연명치료 거부 의사에 대해.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나 나올법한 친절하고 인간미 있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생과 사의 기로에 여러 번 섰을 직업에 대해 겸허해지는 순간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작은 아버지들과 고모는 본인들의 생각을 말씀하셨고, 그저 울기만 하는 그분에게 작은 어머니는 함께 울며 위로하며,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말해야 한다고 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그분은 또다시 한참 울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족들과 함께 중환자실 앞에 있는 작은 사무실로 가서 수술을 하지 않고, 연명치료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서류를 작성했다. 아버지의 상황이 위급할 경우 연락을 주기로 했고, 가족들은 모두 헤어졌다. 새벽 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이제는 모두 대기상태다. 집에 가서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며칠치 짐을 싸야 하는지 모르겠어 일단 일주일치 짐을 챙겼다. 회사에 양해를 구했다. 하루를 쉬어야 하는지, 이틀을 쉬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 일주일, 일주일 정도는 살아계셨으면 했다. 나는 누워계신 아버지라도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순간을 빨리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여러 생각이 드는 아침이었다. 


그러는 중에 병원에서 아버지가 위급하시니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맥박이 떨어져서 연락을 주셨지만 다행히 떨어진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다. 다행이다. 연락을 받고 마음 졸이며 중환자실에 들어서길 반복하는 과정은 심력이 매우 소모되지만, 그래도 난 살아계신 게 너무 다행이라 생각했다. 


중환자실은 하루에 한 번 면회가 가능하고, 가족 중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코로나검사를 해야 하고, 가족관계증명서도 제출했다. 면회시간에 중환자실에 가족이 있는 많은 분들이 왔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침울한 시간, 공간이었다. 면회를 하러 간 남편은 면회시간이 거의 끝날 때쯤 되어서야 퉁퉁부은 눈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기시간 동안 병원 근처에 있던 올림픽공원 산책을 했다. 아버지 덕분에 올림픽공원을 다 와보네, 꽃이 폈네, 날이 좋네 하다 남편은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말해줬다. 순간 엄청 찐한 꽃향기가 났다. 향기를 따라가 보니 커다란 라벤더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 한참을 앉아있다가 돌아왔다. 적당한 온도, 찐한 달큰한 향기. 인정 많고 따뜻했던 아버지가 아들과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기분이 드는 시간이었다. 


병원 근처 모텔에 방을 잡고 몸을 좀 누이려고 하니, 다시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남편의 말이 맞을까, 아침에 있었던 그저 우려되었던 상황의 반복일까. 전화를 받고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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