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주 평범한 날 가운데서
오랜 시간 보청기 일을 해 오면서, 내가 ‘숙제’처럼 느끼는 어머님 한 분이 계신다.
여든을 훌쩍 넘긴 어머님은 한없이 여린 분이시고, 평소에 가족들로부터 소외감을 느껴서 우울해하시는 분이었다. 잊을만하면 찾아와서 보청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며 하소연을 하시지만 정작 나와는 한참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가시는 분이었다.
그리고, 긴 수다 끝에 매번 같은 말씀을 남기신다.
“원장님, 원장님하고는 이렇게 대화가 편한데... 다른 사람은 소리는 커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아이고, 자꾸 와서 미안해요. 고마워요.”
어쩌면, 어머님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해서 나를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어머님은 어느새 내게 ‘청각 상담’이 아니라 ‘마음 상담’을 받으러 오시는 분이 되었다.
그날도 어머님이 오셨다.
하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순하던 얼굴에 화가 잔뜩 서려 있었고, 1년 전 정부 보조금으로 새로 드린 보청기를 당장 바꿔 달라며 거세게 항의하셨다.
순간, 직감했다.
‘지금 어머님의 정신이 맑지 않을 수도 있겠다.’
불편을 해결해 드리려고 몇 번의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의 방향을 바꿨다.
이럴 때, 내 방은 ‘청각상담실’에서 ‘인생상담실’로 가끔씩 변신을 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어머님, 어떤 순간에 행복하세요?”
“마음이 답답할 땐 성경책을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날씨가 포근해지는데, 동네 한 바퀴 가벼운 산책은 어떠세요?”
어머님은 하나하나 고개를 저으셨다.
“그냥 누워서 눈 감고 있는 게 제일 좋아. 근데 그게 하루 이틀이지. 계속 그러다 보니 그냥... 그대로 죽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
“성경책은 10분만 봐도 눈이 아파서 도저히 못 보겠어. 못 봐."
“산책도 못 해. 고관절이 아파서 몇 걸음만 걸어도 힘들어.”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셨다.
“아, 한약을 먹으면 이게 다 나아질까?” 하며 멋쩍게 웃으신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어머님과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자, 어머님 이렇게 생각을 해 보자고요.
책을 10분이라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많이 걷진 못해도 동네 벤치에 앉아 봄이 오는 냄새와 포근함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저와 이렇게 긴 이야기를 편히 나눌 수 있을 만큼은 귀가 들리니 그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요.
오랜 세월 살아오신 분이라 잘 아시잖아요.
행복도 불행도, 한 끗 차이고 다 마음에서 오는 거라는 걸요.
그래서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도 말이에요.”
이야기를 듣던 어머님은 조금 민망한 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셨다.
“이렇게 이야기 나누며 웃고 계신 모습을 보니, 제가 어머님 옆에 붙어 있으면서 통역도 해드리고 말동무도 되어드리면 좋겠네요.”
그제야 어머님의 눈빛이 평소처럼 따뜻하게 돌아왔다.
무언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편안한 모습으로 문을 나서며 한 말씀을 남기고 인생상담실에서 나가셨다.
“원장님, 미안해요. 고마워요. 근데... 나 좋은 말씀 들으러 또 와도 되지?”
별 거 아니다. 그런데 참 별 거다.
화내는 사람의 ‘화의 본질’을 본다는 게,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게...
만약 평소 어머님의 잦은 방문을 마음속 괴로움으로만 받아들였다면, 그날도 어머님의 ‘화’에만 반응했을 것이고, 그 관계는 불편함만 남긴 채 끝나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작은 방향 전환으로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었다.
크지 않은 변화였지만, 나의 태도가 행복을 찾았고, 마음이 통해서 우리가 머문 시간과 공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음을 나는 안다.
귀를 잘 들리게 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찾아오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데는 한계가 없다.
그렇게 인생상담실은 종종 열린다.
물론 내가 그분들께 배우는 지혜가 훨씬 많지만 말이다.
그날은 우연인지 남편의 진료실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인생상담실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퇴근길 내내 각자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한참을 웃었다.
이런 멋진 사람과 세월을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냥 그런 하루가, 나에겐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