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백

혁명

by 섬광


1. 생각보다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일에는 큰 에너지가 소모된다. 일기를 쓰지 않은 지 몇 주가 흘렀다. 딱히 놀랍지는 않은 일이었다. 몇 해째 3개월 이상 일기를 써 본 적이 없으니 올해도 그러려니 했다. 조금은 달라진 것은 몇 해 전보다는 일기를 펼치는 날이 조금 더 많아졌고, 일기에서마저 나를 속이는 일이 줄었다는 것이다. 올해는 더 이상 밀린 일기를 채우기 하루하루를 복기하거나 일기에서 나를 변호하던 습관을 그만두었다. 대신 손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문장을 자주 적었고 여과 없이 문장을 잇는 연습을 했다. 글씨체는 매일 달라졌으며 일기장 한 칸을 딱 알맞게 채우기도, 못 채우기도, 넘어가기도 했다. 한 여름에 산 연보라 색 일기장은 어느덧 한 달만을 남기고 있었다.


2. 대학을 들어와서 도망만 다니다 처음 받는 합평이었다. 수업 한 시간 전, 아메리카노를 먹고 체했다. 단상에 올라가서는 고개를 내내 들지 못했다. 내가 아닌 나의 창작물이 평가받는 일은 언제나 미묘했다. 그게 곧 나였고 내 글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곧 나에게 문제가 있는 일 같았다. 타자를 치는 손이 자꾸만 떨려서 오타가 났다. 손등을 덮는 니트의 촉감이 유난히 따갑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를 기댈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교수님은 한 시간이나 나를 붙잡아 세워 두셨다. 글을 쓰면서도 찜찜한 부분을 어김없이 지적받았고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칭찬을 들었다. 문체가 취향이라거나 글을 정말 잘 읽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조금씩 들었다. 결론적으로는 소설의 완성도가 높고 굉장히 매력적인 소설이라 아쉬운 부분들이 더욱 크게 보였던 것 같다는 말들이었다. 합평의 말미에서 교수님은 다음 소설을 더 잘 쓸 수 있을 거라면서 격려해 주셨다.

다음. 자리로 돌아와서도 단어가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글이 좋았다고 말해주던 누군가의 눈동자와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오랜 시간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며 벗어났던 공간에서 나는 더 이상 나를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내가 아닌 나의 글이 타인에게 닿는 감각이 조금은 새롭기까지 했다. 타인이 기대하는 나의 다음이 있다는 점에서 아주 조금은 스스로가 대견했다. 우스갯소리로 글과의 연을 끊을 거라던 다짐이 누그러지던 순간이었다. 다음이 아주 먼 일이 아니길 바란다고 생각했다.


자주 가는 책방에서 황정은의 낭독회가 있는 날이었다. 전 날 비가 온 탓에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낭독회는 일곱 시 반부터 시작 예정이었는데 학원 수업이 여덟 시에 끝나 결국 미리 연락을 해두었다. 행사가 진행 중이라면 다른 분들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입장해 달라는 연락에 수업을 마치자마자 책 세 권을 들고 서점까지 뛰었다. 이어폰에서는 RADWIMPS의 スパークル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을 때마다 입김이 미미하게 보였다. 작년 여름, 주하림 시인의 낭독회를 위해 지나치던 길에 피어 있던 능소화가 생각났다. 올여름은 이곳에 오지 못했는데. 경험하지 못한 여름에도 능소화는 피어 있었을지 궁금했다. 바람을 맞을 때마다 날이 건조해지면서 튼 손가락 마디가 갈라져 아프기까지 했다. 뒤늦게 서점에 도착했을 때는 낭독회는 이미 끝나고 질문을 받고 있었다. 황정은은 시간을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도 하나라도 더 많은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말했다.

모든 인물들에 삶을 줘야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열심히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행인 한 명까지. 정말 열심히 생각해요.


황정은과 그의 글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다. 열일곱 여름 새벽마다 읽었던 디디의 우산과 학원이 끝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지겹도록 읽었던 파씨의 입문과 중고 서점을 다 뒤져가고 독서실에서 몰래 읽던 백의 그림자와 그 밖의 모든 소설들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나는 황정은의 글을 보고 자랐다. 그의 소설을 보면서 저런 세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당신의 소설에서 디디가 혁명이라고 발음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나도 혁명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을 믿게 된 것도 당신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당신이 늘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해왔기 때문에 나도 누군가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를 할 수 있었다고. 나는 언제나 당신 같은 어른으로 자라고 싶었다고. 결국 내가 당신의 글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만 할 수 있었다고.

사인회 차례를 기다리면서 오래전 붙여 둔 인덱스를 만지작거렸다. 낭독회 일주일 전부터 기대했던 것치고는 떨지 않았다. 대신 조금 눈물이 날 뻔했다.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는 떨리는 목소리를 짓누르고 문장을 또박또박 말했다. 황정은은 대답을 할 때마다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주었다. 오늘을 기대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사인을 받고 돌아와서는 의자에 조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말소리와 이름을 모르는 재즈 음악이 편안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나뭇잎 하나를 주워 왔다.

keyword
팔로워
매거진의 이전글회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