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백

나의 요리에게

by 섬광


1. 11월부터 유학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원래는 내년 1월 도쿄에서 수험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었는데 비자 문제로 출국이 미뤄지면서 겸사겸사 한국에서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조금 더 잘 된 일이었다. 마지막 학기에 들면서 이런저런 문제들로 예민해져 있던 나에게는 적당한 숨구멍도 되었다. 한 달 정도 학원을 다니자 매일 한 시간씩 일찍 도착해 수업을 기다리는 게 제법 몸에 익었다.

부끄럽지만 기초 교육을 다 받지 않았다. 정확히는 중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하고 고등학교는 가지 않았다. 검정고시로 졸업을 하고 수능마저 얄팍하게 공부한 게 전부였기 때문에 모르는 게 많았다. 나한테 한국 대학은 독일과 일본 유학에 실패하고 (유학원을 찾아갔을 때 열일곱 살이었는데 너무 어리다며 거부당했다.) 현실과 적절히 타협한 결과였는데 늘 현실에 안주해 버린 듯한 감각이 싫었다. 그게 근래 몇 년간 나의 열등감이었고 유학 시험 준비를 시작하면서 고등학생인 아이들 사이에서 내가 대학생이라는 게 좀 쪽이 팔렸다. 열여덟 살에 대학에 합격을 했다고 해도 나의 상태가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조금의 현타와 번뇌 끝에 그냥 그렇게 생각을 했다. 내가 글과 언어에 전념하느라 놓친 것들을 이제라도 다시 채워나갈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했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 문제집에는 지웠다 다시 쓴 자국들이 늘어나고 일본 정치 교과서를 반복해서 읽었다. 수학 문제를 고민하다 새벽에 잠드는 날들이 잦고 에너지 음료 두 캔으로 버티는 날이 많지만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내가 나의 열등감을 마주하고 끌어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우주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다. 며칠 전 교보문고에서 지정 도서를 사면 태양계 달력 포스터를 준다길래 샀던 책이었다. (포스터는 일본에서 자취방을 구하면 붙이려고 고이 접어 두었다.) 어느 물리학자가 쓴 500p짜리 책은 읽기가 어려웠다. 요새 독서량을 늘리고 싶어 매일 자기 전에 한 파트씩 읽고 있는데 졸려 죽겠는 와중에 엔트로피니 열역학 법칙이니 하는 걸 읽고 있자니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없다. 그래도 어쨌든 꾸역꾸역 읽고 있다. 첫 파트에서 수학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한 학문이라고 그랬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든 삼각 함수든 한 번 진리로 정의된 것은 불변성을 지닌다. 어떤 가정의 방정식에서도 수학은 늘 같은 정답을 내놓는 유일한 학문이라는 점에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고작 이런 이야기로 수학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서 수학 숙제들이 거침없이 풀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앞으로 공부할 것들이 조금은 덜 미워지고 정답까지 돌아가는 길이 번거롭지 않아 졌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인간은 죽음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영원하지 못해서 종교와 국가를 만든다. 결국은 세상에 나를 남기고 싶은 욕망이라 인간의 행동 동기는 영원성에서 비롯한다는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정확하게 그 단락을 읽고 나서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밤에 어쩌면 나는 수학과 과학을 지리멸렬하게 짝사랑해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조금은 우스꽝스럽지만 즐거운 가설이었다.


오랫동안 우주를 사랑해 왔다. 나의 첫 타투도 목성이었다. 목성이 기체로 이루어진 행성이고 목성에 빠진다면 그대로 몸이 터져 버릴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랑에 빠졌다. 그 후로 늘 목성에 빠져 죽고 싶다고 자주 생각했고 이미 여러 번 고백한 사실 중 하나이기도 하다.우주가 좋은 이유로는 가능성을 말하고 싶다. 인간이 아는 그 이상으로 넓을 수도 있으며 인간 외의 생명체가 얼마든지 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복숭아뼈가 저릿저릿하다.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기분이 든다. 대체적으로 나는 외계인과 UFO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모습의 외계인과 그의 소중한 비행선을 상상하다 보면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런 걸 믿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각하는 것이 자주 수월해진다. 며칠 전에는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이륙하는 비행기를 UFO로 착각했다. 그게 비행기라서 조금 김이 빠졌고 동시에 UFO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안심했다. 나는 내가 영영 UFO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UFO가 IFO가 되어버린다면 그건 좀 서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최근 영화 <괴물>을 보고 왔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작 중 요리가 외계인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름에 별이 들어가는 것도, 우주복 같은 우비를 입은 것도, 선로 위 쓰러진 열차를 로켓처럼 꾸미는 것도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 같았다. 무엇보다 까만 눈동자가 그렇게 반짝거리는데 내가 그 아이를 단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것마저 외계인 같았다. 몇 번이고 다른 작품에서 본 아이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요리를 얼마든지 더 사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읽었던 화성인 구별하기라는 블로그 글을 좋아한다. 화성인은 자신들에게 지구인스러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지구인스러움에 집착하게 된 것이라고, 그래서 화성인이 지구인보다 더 지구인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요리가 외계인이 맞다면 요리도 지구인이 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지구인보다 더 지구인스럽게 사랑을 말할 수 있었던 걸까?

그 아이가 지구에서 어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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