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백

졸업식

by 섬광


Y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오랜만의 일이었다. Y를 만난 건 신입생 무렵 함께 어울리다 멀어진 이후로 처음이었다. 당시 나는 Y를 좋아했는데 가뜩이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벅차했던 내게 Y의 언행은 조금 무례했고 버겁기까지 했었다. 결국은 여름방학 내내 고민을 하다 거리를 두는 편을 택했고 그 후로 Y와 마주치는 일은 줄어들었다. Y는 일 년 반 만에 몹시 간절한 말투로 나를 붙잡았다. 쉼표가 많았던 문장은 잠깐만 시간을 내 달라는 내용이었고 그 문장에 어쩐지 이유를 묻고 싶지 않았다.

Y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를 불러내 시집 두 권을 선물해 줬다. 작년 여름에 주기로 했던 시집을 이제라도 주고 싶었다며 Y는 내 품 안에 시집을 안겨주었다. 너라면 근래 출간된 시집은 전부 다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가장 최근에 나온 걸 샀다는 말에 시집을 읽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같이 끼워둔 편지에는 너에게 무겁게 굴었던 점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는 문장이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피해 다닌 나를 한 번쯤은 원망할 법도 한데 순수하게 나의 안녕을 바라는 Y가 조금은 밉기까지도 했다. 그해 Y가 내게 얼마나 불친절한 사람이었는지 생각하면 내가 모르는 시간 동안 Y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았다.


언니 나 당장 가는 거 아니야. 졸업식도 가.

나는 네가 바로 가는 줄 알았지. 졸업식에 와? 그럼 나도 갈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을 하느라 목소리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몸이 조금 떨리는 게 복도가 추워서인지 몸에 힘을 줘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Y와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헤어졌다. 지하 동방에 가서도 편지와 함께 그려준 그림을 꺼내 보았다. 책 읽고 있는 내 모습을 그려 줬는데 그게 나랑 하나도 닮지 않았고 전보다 그림 실력이 늘어 있어서 웃음이 났다. 일본어를 모른다던 Y는 그림 옆에 幸せな一日 (행복한 하루)라고 굵은 글씨로 적어두었다.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는 연락에는 조심히 들어가라고 답장했다. 비가 세차게 오는 날이었다.


드디어 종강을 했다. 마지막 학기라 그런지 대체 과제들이 전부 가벼운 편이라 금방 끝낼 수 있었다. 기말 시험까지 마치고는 동기들과 자주 갔던 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고 자주 갔던 카페에서 앉아 있었다. 음료와 디저트를 시키고 쿠폰을 한 곳에 모아 찍으려 하는데 옆에서 H가 너 이제 여기 올 일 없잖아! 라며 나를 말렸다. 그렇네……. 정말 이 카페에 더 이상 올 일이 없구나. 모서리가 해진 쿠폰을 내미려다 다시 손바닥 안으로 감싸 쥐었다.

평소라면 케이크 하나로 나눠 먹었을 테지만 마지막 날에는 머핀과 빙수까지 주문했다. 테이블 위로 진하게 풍기는 달콤함에 머리가 울렁거렸다. 서로의 어깨와 벽에 기대어 영양가 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졌다. 나는 그게 조금 슬펐는데 오늘이 끝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아무것도 아닌 날이어서 그랬다. 약속 같이 했던 일들이 더 이상 약속 없이는 하지 못할 일이라는 게 가슴을 짓눌렀다. J와 인쇄를 마친 책을 받으러 가는 길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얄미웠고 지하철이 늦게 오기를 바랐다. J와 헤어지는 게 싫어서 평소 내리던 역보다 한 정거장을 더 가서 헤어졌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자주 가던 카페 이름을 헷갈렸다. 다시 돌아올 어느 목요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학교가 싫었다. 매일 보는 사람들과 강의실에 숨이 자주 막혔고 여러 번 자퇴를 마음먹었다. 그 단단한 권태와 무력감은 이번 학기 끝에 가서 수월하게 미끄러져 내렸고 마지막 수업에 나는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절대 잊으면 안 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그런 대사가 나온다고 그랬다. 수차례의 절망과 상실감이 있어서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여전히 글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지 않기를 잘했다고. 여전히 나에게 관성이 작용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요즘이었다.

최근에는 Greeeen의 卒業の唄~アリガトウ は何度なんども言いわせて~를 자주 찾아들었다. 2월에 어느 날 있을 졸업식을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남들보다 시간이 배로 드는 사람이고 삶의 궤도가 변화함에 따라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다. 노래를 들으면서 졸업식에 서 있는 상상을 많이 했다. 희미한 얼굴들과 어수선한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어졌다. 어깨를 끌어안으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향수 냄새와 심장 박동이 느껴져서 조금은 울고 싶었다. 노래를 듣다가 울컥하면 자주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괜찮아지면 다시 걸었다.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서 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떤 표정을 지으며 인사해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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