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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Oct 25. 2024

시선: 바다 위의 보험사기단

죽으려고 환장했네

#1-A

 내가 지금 몰고 가는 배는 길이가 365 미터 정도 된다. 해안가에서 보이는 조그만 통통배 어선들은 5~10 미터 정도. 내가 만약 항해를 하다가 그런 어선을 마주한다면 그 어선은 새우다. 우리 배는 고래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그 고래. 부딪히면 고래는 간지럽기만 하고 새우만 손해다.

 항해라는 것을 처음 해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배를 몰고 가던 중 내 바로 앞에 어선 한 척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어선을 피하기 위해 일찌감치 오른쪽으로 틀었다. 충분한 거리를 뒀기에 이제 안전하게 지나가겠다 생각하려던 찰나, 어선이 내가 틀었던 방향으로 슬금슬금 오더니 다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거야.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일단 배를 안 박는 게 중요하니까 어찌 됐든 피해야 했다. 궁시렁대며 다시 반대인 왼쪽으로 선수를 틀었다. 그러더니 아니 이 자식이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슬금슬금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 앞을 또다시 가로막았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이것도 신종 보험사기 수법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배 크기 차이만 봐도 부딪히면 자기 배만 산산조각 날 것이 뻔했다. 이렇게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감수해 가며 보험사기를 치려 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사람임에 분명했다. 하여튼 아주 죽으려고 환장을 했다.

 나는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왼쪽으로 더 크게 꺾었다. 다행히도 어선은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아싸, 보험사기는 면했다. 쌩돈 나갈 뻔했다.


#2-A

 그러고 얼마 뒤의 일이다. 평소처럼 잘 몰고 가던 우리 배 앞에 횡단하는 어선 두 척이 보였다. 이번에는 그냥 새우는 아니고 길이 15 미터쯤 되는 왕새우였다. 그 어선 두 척은 서로 거의 붙어서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비슷한 속도를 유지하며 항해하고 있었다. 참 사이가 좋아 보이는 왕새우 한 쌍이었다.

 우리 배 오른쪽 대각선 즈음에 보이던 그 어선 두 척은 레이더로 보았을 때 우리 배 앞을 충분한 거리를 두고 통과할 것 같았다. 그 어선들이 지나간 자리를 유유히 지나가면 되겠다 싶었다.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굳이 방향을 틀지 않았다.

 하지만 웬걸, 이 친구들이 갑자기 내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우리 배 오른쪽을 스치며 빠지려는 모양새였다. 정말 간당간당 했다. 아니, 이것도 또 새로운 보험사기 수법인가? 아무리 좀 커진 새우라지만 고래한테는 여전히 뼈도 못 추릴 텐데 말이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 여기 두 명 추가요. 세상에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 많네.




 아무튼 나는 그 배들이 오는 방향의 반대방향인 왼쪽으로 완전히 틀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막무가내식 돌진을 겨우겨우 피했다.






 초임 항해사였던 내게 세상은 이해가 안 되는 것들 투성이였다. 이 큰 배와 부딪히면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동은 경험이 없던 내가 봐도 다분히 의도적인 것들이었다. 어선들은 대체 왜 그렇게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어야만 직성이 풀릴까? 그들은 정말로 보험사기단이었을까? 정말 죽으려고 환장한 이들이었을까?

 초임 딱지를 벗고 차츰 항해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내막은 점점 벗겨지고야 말았다. 그 보험사기단의 숨겨진 진실이.



#1-B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내 앞을 가로막던 그 어선은 사실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가 바다에 띄워놨던 그물망이다.

 그가 처음부터 내 앞에 떠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자리에 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오른쪽으로 선수를 틀자 따라왔던 이유는 공교롭게 그 자리에도 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내가 왼쪽으로 틀었을 때 되돌아 쫓아온 것은 원래 자리에 있던 어망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크게 왼쪽으로 틀자 나를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던 것은 왼쪽에는 설치한 어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2-B

 쌍을 지어 항해하던 두 어선들도 사실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두 척이 쌍을 지어 서로 딱 붙은 채 일정한 속도로 항해하는 어선들을 '쌍끌이 어선'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각자의 선미에 어망의 끝단을 한쪽씩 매달아 두고 바다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닌다. 어선 사이에서 뒤쪽으로 아치형을 그리며 주욱 빠진 그물망은 생각보다 그 길이가 길다. 그 당시 나는 그들의 뒤쪽으로 지나가려 했으므로 그대로 지나갔다간 그물을 건들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무리하게 꺾어 내 오른쪽을 스쳐 지나갔던 것은 그들의 어망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지금의 나라면 그때의 나를 한편으론 이해하겠지만 불만스럽게 궁시렁대는 모습을 보고 크게 다그쳤을 것이다. 그들이 죽으려고 환장한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히 네가 그 이유를 몰라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일 뿐이라고. 그 내막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을 무턱대고 욕하는 것은 멋있지 않은 행동이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만, 모르면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건 죄라고.

 바다는 그 밑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여주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밑이 안 보인다고 해서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의 이해의 폭을 가로막는 그 숨겨진 무언가가. 이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뭔가 밑에 잔잔히 가라앉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그 믿음만이 죽으려고 환장한 보험사기단의 누명을 벗길 수 있다.

 이제 나는 화가 날 이유가 없다. 이해가 안 간다며 성질을 낼 이유도 없다. 이건 단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니까. 나였어도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또 쌍끌이 어선이군. 걱정 마십시오. 제가 널찍이 귀선의 앞으로 피해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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