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사에게 생명과 같은 레이더와 엑디스*는 듣기만 해도 알 수 있듯 항해를 하는데 피와 살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이 기기들에 뭔가 이상이 발생하는 경우는 항통장비 담당인 2등 항해사에게 특히나 골치다.
*엑디스(ECDIS) : 바다의 지도인 '해도'를 보여주는 일종의 내비게이션이다.
예를 들어, 레이더의 물표들이 갑자기 희미해지며 사용 불능 상태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고장 난 순간부터 통상적으로 첫 번째로 하는 일은 머리를 싸매는 일이다. 그렇게 대충 5초간 모발과 두피의 건강을 확인하는 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해결책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일단 수많은 기기를 만져보며 터득한 방법 중에서, 기기 고장에 매우 효과적이면서 즉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조치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전원을 껐다 켜는 것. 전문용어로 'Reset [ˌriːˈset]'이라고 한다. 다만 하나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조치 후 이에 대한 결과 보고서를 작성할 때 작문에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껐다 켜봤더니 안 됨" 이라고만 쓰지 말라는 의미다. 좀 없어 보인다. 이럴 땐 "RESET 시도하였으나 증상은 동일함"처럼 영문과 한문을 'global [ˈɡloʊ. bəl]'하게 버무려서 쓰도록 하자.
만약 'RESET 시도하였으나 증상이 동일'하다면, 그때부턴 대충 아래의 순서대로 수리를 진행한다.
1 매뉴얼대로 트러블슈팅 한다 - 2 안 된다 - 3 메이커에 물어본다 - 4 시킨 대로 해본다 - 5 안 된다 - 6 메이커에 물어본다 - 7 시킨 대로 해본다 - 8 안 된다 - 9 메이커에 물어본다 - 10 시킨 대로 해본다 - 11 안 된다 -...
이렇게 하다가 정 안 되면 부산에 기항할 때 엔지니어를 수배한다. 이것도 있어 보이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나는 잘 모르겠으니 고쳐주세요!" 하는 셈이다.
간혹 모르는 사람에게 "항해장비를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라고 말하면 세상 무슨 초일류 엔지니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아는 것 하나 없는 나의 심각한 무지에 대해 괜스레 죄송할 따름이다. 항해사는 어떤 상황에서든 일단 어디론가 냅다 물어보는 게 일의 전부다.
그래서 혹여나 누군가가 나에게 항해사의 필수 덕목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대충 두 가지로 추릴 수 있겠다.
첫 번째, 얼굴에 철판을 깔고 냅다 질문을 갈길 수 있는 뻔뻔함.
두 번째, 질문이 안 부담스럽게 말에 윤활유를 발라주는 센스.
아, 한 가지만 더 추가하자면 문의 후 답변이 오는 동안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평온한 마음자세가 세 번째 덕목 되시겠다.
이건 고장 난 기기가 내 담당기기가 아닌 경우에도 얼추 비슷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일등 기관사의 담당기기인 엔진이 고장 났다고 하면 내가 하는 일은 그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또는, 삼등 기관사의 담당기기인 에어컨이 고장 났다고 하면 내가 하는 일은 그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전화하는 것, 그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굳이 있다면 심각한 문제는 아니길 진심을 다해 빌어주는 수밖에.
이때가 바로 항해사의 첫 번째 덕목이라고 하였던 '뻔뻔함'이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특히 새벽에 갑자기 기기가 고장 나게 된 경우에는 그 담당자가 설사 꿈에서 좋아하는 연예인과 데이트하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악문 채 그를 깨우는 수밖에 없다. 일기사든 삼기사든 전화를 받는 순간, 두피건강을 체크한 뒤 RESET을 시도하러 간다.
이렇듯, 항해사도 바쁘고 기관사도 바쁜, 갑판부원도 바쁘고 기관부원도 바쁜, 조리장도 바쁘고 조리원도 바쁜 게 배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의 3배 정도 되는 크기의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에 고작 20명 남짓의 선원들만이 배를 하루종일 지키면서 중국도 갔다가 중동도 들르고, 유럽도 찍었다가 미국도 가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장정 70일가량의 항해를 마치고 부산에 입항하면 평균 접안 시간은 이틀 남짓이다. 이 이틀간 배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대충 아래와 같다.
153개의 보급물품들과 94개의 보급자재들 수급, 2000만 원어치의 식자재 수급과 15개의 크고 작은 수리작업들, 육상 심사관님의 안전 검사와 회사 내부적인 안전 검사에, 얼추 4400개 정도의 컨테이너 적양하 작업. (71,000,000 kg 정도)
이 많은 일들을 이틀 만에 다 몰아서 끝내야만 하는 이유는 약 70일의 항차동안 한국에 있는 날이 고작 이 48시간뿐이기 때문이다. 이 방대한 양의 작업을 짧은 시간에 다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각 작업의 전문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우르르 몰려와 각자의 일들을 타임어택하는 것과 같다.
출근 시간에 맞춰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작업자 수십 명은 배가 접안하기가 무섭게 일제히 열을 지어 배를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무실에 들어온 그들은 간단한 브리핑 후에 각자의 작업위치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의 사무실은 출근길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로 향하는 톨게이트의 모습을 연상케 할 만큼 엄청난 병목현상을 자랑한다.
그들은 그때부터 퇴근시간을 사수하기 위해 시간과의 처절한 싸움을 시작한다. 항해사나 기관사가 일일이 찾아가서 작업을 빨리 해달라고 하지 않아도 그들이 알아서 신속한 작업을 보장해 주신다.
어느 날은 브릿지*에 항해기기 관련 작업이 많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브릿지(Bridge): 항해사들의 항해가 이루어지는 컨트롤타워. 보통 거주구역의 가장 꼭대기층에 위치한다.
브릿지에서는 약 5개 정도의 항해기기에 각각 독립적인 작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작업 대상, 작업 방식, 작업 형태, 출신 회사 등 모든 것들이 달랐지만 한 장소에 모여 오로지 각자의 기기가 다시 잘 되기만을 바라며 열심히 일하시는 중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간단히 사들고 온 김밥을 점심으로 대충 때우고는 다시 작업에 임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작업이 끝나면 점심을 먹을 것이라며 신속한 작업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명하시기도 하였다.
그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작업들 하나하나는 일견 서로 큰 관련이 없어 보일지 몰라도, 결국 이 작은 작업들이 하나둘 모여서 이 집채만 한 배가 기름을 꾸역꾸역 태워가며 몇천만 킬로그램의 화물을 운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 많던 작업들이 이틀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모두 마무리될 수 있는 이유는 이 배 한 척에 사람이 한 바가지가 들어와 타임어택을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 배 한 척을 운항시키기 위해 그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말이다.
나는 한때 항해기기를 다루며 집채만 한 배를 움직이는 것에 대해 내가 잘난 줄 자만한 적이 있었다. 자동차 핸들처럼 생긴 조그만 타를 간단히 좌우로 꺾기만 해도 트럭 몇 대 크기의 타판이 육중한 몸집을 움직이며 배를 좌우로 꺾어주니 마치 내가 잘나서 이런 배를 모는 줄로만 알았다.
이런 과거의 내게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은 황정민 배우님의 한 시상식 장면이다. "한낱 배우 나부랭이는 수많은 스탭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것일 뿐"이라고.
한낱 항해사 나부랭이도 마찬가지다. 겉으론 이 큼지막한 배를 마치 혼자서 휙휙 움직이며 엄청나게 뭐라도 되는 듯이 보일 순 있지만, 나 혼자서는 컨테이너 한 개조차 움직이는 건 고사하고 흠집 하나 내지 못한다. 내 담당기기조차 잘 몰라서 고장 날 때마다 자문해 달라고 떼쓰기만 하는데 더 얘기할 게 뭐가 있을까?
항해사는 절대 기관부와 조리부가 없이는 배를 몰지 못한다. 더 나아가 그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작업자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배가 하루도 채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지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지만 모두가 서로 없으면 안 되는 연약하고도 강인한 존재들이다.
이런 것을 보면 배라는 것은 하나의 작품이 아닐까. 수많은 화가가 한데 모여 완성한 하나의 거대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