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일이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울 때 나에게는 마치 영화 속 어두컴컴한 지하세계와도 같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2M 수심 구간! 그곳은 나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그곳을 볼 때는 항상 흐린 눈을 뜨며 시선을 피하기 바빴기에, 어느새부턴가 그곳을 떠올릴 때면 무언가 으스스한 기운이 새벽안개처럼 자욱하게 낀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내 키보다 더 깊은 물에 있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그 바닥이 어디까지인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얼마나 깊은지 알기만 한다면 수영을 못해도 바닥을 찍고서라도 올라오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발이 아무 데도 닿지 않고 있으면 도저히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내게 가장 큰 공포였다. 호랑이 굴보다 더 무서운 게 끝을 모르는 동굴이라고 하였던가. 호랑이 물밑보다 더 무서운 건 끝을 모르는 물밑이다.
그런데 그런 미지의 물밑 중에서도 끝판왕 최종보스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바다(ocean) 되시겠다. 바다는 낮에는 햇빛을 산란시켜 시퍼렇고, 밤에는 빛이 없으니 시커멓다. 낮이나 밤이나 밑이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다.
어디가 얼마나 깊은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알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우리는 항해한다. 항해라는 것은 그렇다. 배의 밑바닥이 언제 바닥과 부딪혀 산산조각 날지 모른다. 망망대해에서 항해사는 끝도 없이 펼쳐진 두려움의 수평선을 가로지른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배를 어떻게 몰고 가시나요?"
다행히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전 덕분인가, 이런 겁쟁이 항해사도 안도하고 궁예짓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비밀은 바로 그림 한 장과 표 하나에 있다.
첫 번째, 그림 한 장
항해사가 두려움의 최종보스를 해소하는 첫 번째 비밀은 '해도(navigational chart)'이다.
영어 이름이 길어 어려워 보이지만, 그냥 바다를 위한 지도라고 생각하면 쉽다. 각 국가의 해양조사 기관에서는 주기적으로 주변의 바다 위를 꼼꼼히 지나가면서 측심*을 한다. 이렇게 위치별로 측심된 결과를 긁어모아서 각 해역마다의 해도를 작성한다.
*측심 :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한 행위
이렇게 만들어진 해도를 사용하면 항해사들이 항해를 하기 전에 미리 항로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어디의 수심이 얼마인지를 미리 확인할 수 있어 미연의 위험요소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해도조차도 수심을 표시하는데 한계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수심은 조석 현상* 때문에 시간에 따라 지속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시간에 의한 변화까지 해도에 나타내기에는 정보량이 너무 과다해져서 보기 불편해질뿐더러 표시할 여백도 남아나지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다음 이야기할 '조석표(Tide table)'다.
*조석 현상 : 하루에 두 번 밀물과 썰물로 인해 해수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현상.
두 번째, 표 하나
항해를 담당하는 이등 항해사는 통과하는 해협이나 입항하는 항구에서의 조석 현상이 어떻게 되는지 조회한다. 만조와 간조*일 때가 언제인지를 보고 그 시간대에 배가 통과할 수 있는지를 확인한다.
*만조와 간조 : 만조는 물의 높이가 가장 높을 때, 간조는 가장 낮을 때를 말함.
항해사는 해도에 나와있는 수심에 조석 현상을 가감해야 한다. 해도에 나온 수심은 그 지점에서 더 이상 얕아질 수 없는 가장 낮은 수치가 적혀 있다. 따라서 간조 때라고 할지언정 그 수심은 해도에 나온 수심보다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석 현상을 반영할 때는 항상 해도 수심에 '더하는' 방식으로 가감한다. 만약 시간대를 보았을 때 만조로 향하는 시간대라면 더하는 값은 더 커지고, 간조로 향한다면 더하는 값이 작아진다.
이 조석 현상의 추세는 배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여겨봐야 할 만큼 중요하므로 이것을 한눈에 보기 쉽게 표로 정리하여 배 곳곳에 게시해 두는데, 이것을 조석표(Tide table)라 한다.
사실 조석표도 중요하지만, 해도에 비하면 그 중요도는 새발의 피다.
해도에 나온 수심이 낮아 우리 배가 갈 수 없다면 안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해도 자체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도가 없다면 수심을 몰라서 지금 당장 배가 해저의 장애물에 충돌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다. 해도가 없는 항해는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이것이 바로 국제법 상 해도가 없는 배는 '항해 불능'으로 취급하는 이유다. 모르는 길은 가지도 말라, 가는 길의 위험성을 모르고 가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없다는 의미다.
내가 어린 시절 깊이를 모르는 곳을 유독 무서워했던 이유는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배도 마찬가지다. 해도가 없어 깊이를 모르는 곳을 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의 선박 침몰이 가져오는 금전적 손상은 천문학적인 수준이라는 것은 덤이다.
특히 여객선일 경우 그 인명 피해는 훨씬 더 막중하다. 웬만해서 우리가 아는 초대형 여객선은 여객의 수가 3,000명을 웃돈다. 그런 배를 모는 선장이 자기 배가 가는 길의 수심도 모르고 간다는 것은 그냥 3,000명의 목숨을 내놓고 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배를 모는 입장에서는, 아주아주 당연하게도 수심을 까다롭게 따지고 해도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참 인생에도 해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쪽으로만 가면 절대 어떤 장애물에도 부딪히지 않고 탄탄대로일 것이라 알려주는 그런 해도 말이다.
그런데 아쉽지만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 중 어떤 것이 얼마나 깊은지, 그래서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못한다. 기회의 수심을 누군가가 종류별로 딱딱 '측심'해준 적이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기회를 밟고 지나가면 노다지 같은 보물섬이 기다리고 있을지, 삐쩍 마른 황무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알 수가 없다. 참, 이를 어찌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가 없다는 불안한 마음에 출항을 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배 안의 식량은 점점 동이 날 것이고, 안 쓰는 배는 곳곳이 녹슬어 시간이 지나면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어서라도 우리는 출항해야 한다. 그리고 이왕 출항해야 한다면 해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할 필요는 있다.
출항하기 전 체크를 한 번 해 보자. 배를 조금이라도 더 가볍게 하면 배의 깊이가 줄어들 테니 좌초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낮아질 테다. 너무 쓸데없이 많은 걱정을 배에 싣고 있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별로 고려할 필요 없는 사소한 문제를 침소봉대해서 배를 무겁게 만들고 있지는 않았는가.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 과감하게 빼버리자. 우리의 배를 가볍게 탈탈 털어보자. 너무 무겁게 생각하면 잘 되려던 일도 안 풀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