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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Oct 19. 2024

변화: 동전이 필요 없는 코인노래방

싱싱한 목만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한국인 치고 노래 못하는 사람 없더라."

 어떤 경유로 이런 편견이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면 생각보다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는 아마 한국에 노래방 문화가 워낙 발달해 있고, 가는 곳곳마다 코인노래방 하나씩은 꼭 있으니 그런 환경을 보고 대충 짐작하는 말이리라. 아마 편견이 생기는 과정에 BTS 가 한몫했을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선원들끼리 통용되는 말이 있다.

 " 배 타는 사람들은 다 노래를 잘하더라."

 보통 이런 말을 할 때는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를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맥락이므로 '나 빼고는 다 잘한다'라는 뜻인데, 모든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과연 모든 사람이 다 노래를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사람이 다 노래를 잘하는 것일까?

 아무튼 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선원들이 이런 인상을 받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선원들의 가창력이 상향평준화 되어있음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상향평준화 된 이유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만약 이걸로 논문을 쓴다면 아마 어디선가 내 통찰에 깊게 감명을 받은 실용음악과 학과장님이 나를 초빙하고 싶다며 전화로 귀찮게 할지도 모를 테니 논문을 쓰는 것은 자제하도록 하고 여기에 가볍게 끄적여보겠다. (아님 말고)

 선원들의 상향된 노래 실력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아마 '노래방에 대한 접근성'일 것이다. 다른 배들은 모르겠지만 상선(컨테이너선, 자동차선 등 화물을 싣고 다니는 배)에는 동전 없는 코인노래방이 예외 없이 비치되어 있다.

  이 노래방 기계들은 대체로 꽤나 최신화가 되어있는 상태로, 조금 민감하게 노래방 기계에 신경 쓰는 배에서는 2~3개월 이내에 한 번씩 최신음악 업데이트를 한다. 노래방 사업을 해본 적은 없어 업소에서는 얼마 주기로 하는지 모르겠지만, 2~3개월 주기의 업데이트라면 일단 체감상으로는 실제 상업용 코인노래방과 큰 차이가 없다.

 노래방 기계가 비치된 사관휴게실 또는 부원휴게실은 공용구역이기 때문에 누구든 언제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동전이 없어도 무한정 부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되시겠다. 이 휴게실은 그야말로 "동전 없는 코인노래방"인 셈이다. 내 방에서 계단을 몇 걸음만 내려가면 언제든 나를 환영해 주는 노래방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노래를 자주 접하게끔 해준다.


 선원들의 상향된 노래 실력의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다른 취미 생활에 대한 낮은 접근성이다.

 승선을 하면서는 취미 생활이 상당 부분 제약된다. 취미 생활 자체가 어떤 성격을 갖느냐에 따라 승선 중에도 이어서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 가능성이 좌우된다.

 예를 들어, 클라이밍, 스피닝, 스케이트, 서핑 등 갖춰진 환경을 필요로 하고 고도의 장비까지 요구하는 취미는 배에서 즐기기 어렵다. 일단 배에는 클라이밍을 할 만한 세팅도 안 되어있고, 스케이트를 탈 만한 빙상장도 없다. 또한, 어떤 장비든지 크기가 크거나 가격이 비싸면 그것을 배로 갖고 오는 것 자체가 번거롭고 꺼려지는 일이 되기도 한다.

 반면에 글쓰기, 헬스, 미술, 기타, 전자드럼, 전자피아노 등의 취미들은 필요한 도구가 없거나 있어도 휴대성이 좋은 편이라 장소에 별로 구애받지 않는다. (헬스는 예외적으로 배에 대체로 헬스장이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그중에 어떻게 보면 최상위에 있는 취미 중 하나가 바로 노래다. 정말 흔치 않게 아무런 준비물 없이 그저 목 상태만 좋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노래를 부르는 일이다. 거기다가 짱짱한 마이크에 에코를 잔뜩 넣어 부르는 것만큼 선원들에게 스트레스 해소가 되는 것도 많이 없다.

 이처럼 할 수 있는 취미가 제한된 상태에서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한 노래방 기계는 많은 선원들의 애착품이 된다.






 취향이 계급이 된다고 하였던가? 베스트셀러 <아비투스>에서는 취향 또한 그 사람의 계급을 알려주는 항목 중 하나라고 하더라.

 흠, 계급까지는 모르겠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취향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라는 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하는 항해사가 하고 싶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찌저찌 항해사가 되어 배를 타다 보니 대양 한가운데 무료한 삶 속 즐길 만한 것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찾으려고 보니, 역마살 가득한 선원의 삶에 어울릴 만한 즐길거리를 찾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이끌렸을 것이고, 그렇게 그만의 선율이 배 위를 점점 채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늘어난 그의 노래 실력은 그가 앞으로 짠내 나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러 떠났을 때에도 여전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가 키운 노래 실력은 선원으로서의 경력이 없었다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항해사에게 있어 '노래'는 그들이 배와 바다라는 환경 변화에 적응한 단편적인 예시다. 그들은 노래방을 가는 것뿐만 아니라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방법으로 변화에 적응했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는 이렇게 글쓰기를 통해 승선 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조립식 미니어처를 완성하거나 제빵을 하는 것이 취미인 경우도 있다.

 내가 변화 시리즈를 의, 식, 주, 취미로 나눠 보여준 것처럼, 항해사를 비롯한 선원들은 각자가 나름의 방법으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입고 먹고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어찌 보면 사람이 살기에 상당히 극단적인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바다라는 환경에서도, 육지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꽤나 유쾌한 방식으로 삶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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