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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Oct 22. 2024

시선: 배에서만 쓰이는 영어 공식?

"진짜" 영어 실력의 정체

 나는 태생이 매우 분석적인 편에 속해서, 학창 시절 동안 국어는 약해도 문법 과목에는 꽤 능했다. 오죽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거의 10년이 되었는데도 주체 높임 선어말 어미나 관형격조사 같은 괴상한 문법 용어도 그 의미와 예시를 줄줄 읊을 정도로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문법을 이렇게 잘 아는 이유는 문법에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틀린 부분을 너그러이 넘어가지 못하는 이상한 집착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오류가 있는 문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탓에 문장을 하나하나 쪼개는 문법적인 접근 방식이 나한테 맞았을 뿐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부량이 더 늘었을 뿐이고, 공부량이 많아지니 잘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쓸 때는 문법을 매일같이 틀린다.)

 이런 분석적인 면모는 영어 공부를 할 때도 이어졌다. 소통을 하는 데 있어서 문법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본능이 나를 끊임없는 검열의 굴레로 이끌었다. 한 문장 한 문장 말할 때마다 문법이 안 틀리게 말하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그래도 끊임없는 노력 덕에(?) 토익도 만점을 받아보고 대화할 때 문법적인 부분에서 스스로 꽤나 만족할 정도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놈의 집착은 나를 쉬이 놓아주질 않았다.

 이 집착으로 인해 나는 문법이 틀렸다는 이유로 말을 하다가 멈추는 경우도 있었고, 서류 어딘가 적힌 문법 오류가 너무 신경 쓰여서 한 장을 통째로 다시 작성하기도 했다. 전자 해도 상에 적힌 글귀의 문법 오류가 눈에 자꾸 밟혀 초과근무를 하면서까지 글자를 고치기도 했다.

 아니, 문법 틀리면 고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태 내가 시간을 쏟아부었던 수많은 문법 오류들에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그 오류들 중 열에 아홉은 의미 전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사소한 오류였다는 점이다.

"Before 2 hour arrival". 이 표현은 내가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문법 오류의 대표적인 예시다. 사실 이렇게 표현해도 맥락상 '도착 2시간 전'이라는 의미로 충분히 받아들여졌겠지만, 나는 이 표현을 이대로 두는 게 도저히 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인수인계를 받고 나면 전자 해도에 적힌 이 표현들은 죄다 입맛에 맞게 고쳤다. "2 hour before arrival"로 말이다.

 이렇게 내가 경험한 문법 오류들은 사실 고치지 않아도 의미 전달에 큰 문제가 없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데다가, 딱히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업무 효율을 생각한다면 그냥 못 본 척 지나치는 편이 백 배 나았을 것이다. 졸지에는 이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쓰느라 오히려 더 중요한 일을 미루는 경우까지 생기고 나서야 이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내 업무에 얼마나 적지 않은 장애를 줄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런데 사실 올바른 문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단순히 의미 전달에 영향을 안 주는 것에만 그친다면 차라리 낫다. 왜냐하면 때론 올바른 문법이 의미 전달에 장애를 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오히려 문법을 파괴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을 깨달은 것은 실습생 신분으로 첫 배를 승선했을 때였다. 영어에 대한 과한 자신감으로 호기롭게 승선했던 그 배에서 나는 한동안 외국인과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꽤나 애를 먹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깨달았다. 이 불통의 핵심에 내가 가진 문법에 대한 집착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배에서 쓰이는 영어 표현들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 굳어진 나름의 공식이 있었다. 배에서는 대외적으로 오가는 메일을 제외하고는 영어를 씀에 있어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편이다. 목표하는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불필요한 단어를 생략하거나 불필요한 발음을 생략하는 것이다.

 말로만 늘어놓으면 이해가 잘 안 갈 테니 배에서 실제로 매우 자주 쓰이는 치트키 영어 표현 몇 개를 소개한다. 이들은 문법적으론 전혀 맞지 않는 주먹구구식 영어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배에 승선해 있는 사람들이나 관련된 육상 직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을 정도로 자주 쓰이면서 소통에 막힘이 없는 표현들이다.





1. No have. (나한테는 없어)
 : 굳이 늘어뜨려서 "I don't have it."과 같이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다. "노해브" 한 마디면 당신에게는 찾고자 하는 물건이 없다는 걸 단 번에 전달할 수 있다. 왜 "Not have"도 아니고 "No have"냐고 물으신다면 전자가 "t" 하나가 더 있어 발음하기 훨씬 귀찮기 때문이다.

2. Not yet finish. (아직 못 끝냈어)
 : 원래라면 "I haven't finished it yet."과 같이 이야기해야겠지만, 오히려 이렇게 길게 말하면 더 못 알아듣는다. 위와 같이 핵심만 짚어서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사실을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다. 간혹 "finish" 또한 생략해서 "난녯" 이라고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3. Already. (이미 끝냈어)
 : 어떤 완성된 문장에 부사 "already"를 덕지덕지 붙여 굳이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서로 화제를 알고 있는 상황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올레디" 한 마디만 해주면 이미 해당 업무는 끝마쳤다는 사실을 쉽게 알려줄 수 있다.

4. No good. (별론데)
 : 이 표현은 뭔가가 맛이 없을 때,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완곡하게 거절할 때 등의 다양한 상황에서 쓸 수 있다. "Not good"이라고 하면 되는데 왜 굳이 "No good"이냐고 물으신다면 직접 발음해 보시면 알 수 있다. 생각보다 "t" 발음이 상당히 귀찮다.

5. Santa Maria. (완전 맛이 갔는데?)
 : 컨테이너가 손상되었을 때, 배가 욱신거릴 때, 음식을 했는데 맛이 엉망일 때 등 무언가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경우 광범위하게 쓸 수 있는 만능 표현이다. 만약 배가 아프다면 "My stomach Santa Maria."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어원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에 썼던 배 이름으로써, 산타 마리아 호는 실제로 히스파니올라 섬에 좌초된 이후 분해되어 요새 건설에 목재로 보충되었다고 한다. 아마 배가 분해되었다는 것이 비유적으로 쓰여 지금까지 온 듯하다.




6. Let go. (바다에 갖다 버려)
 :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 같은 것들은 바다에 절대 버리면 안 되겠지만, 상하기 직전의 과일이나 과일 껍질 같은 것들은 바다에 버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때 바다에 버리는 일체의 행위를 뭉뚱그려 "렛고"라고 표현한다. 겨울왕국 OST <Let it go>도 제목의 뜻 자체가 붙잡아두지 말고 놓아주라는 의미다.

7. What time arrival? (언제 도착해?)
 : 다음 항구에 언제 도착하는지는 선원들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다. 도착 시각을 대충이라도 알아야 그에 맞게 각자가 입항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목적어를 달지 않고 "What time arrival?" 이라고만 묻더라도 다음 항구 도착 시간에 대해 묻는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8. How many months? (배 탄지 얼마나 됐어?)
 : 선원들에게 입항 시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중요한 정보는 휴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다. 휴가를 받기 위해선 계약 기간을 채워야 하므로 여태 승선을 얼마나 했고, 계약 만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필수다. 배에서는 굳이 "since"를 갖다 붙이지 않고 몇 달이냐고만 물어도 어떤 선원이든 승선한 개월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찰떡같이 알아들을 것이다.





 난 처음에는 이런 주먹구구식 영어에 대해 은근한 거부감을 느꼈다. 여태까지 학교에서부터 익숙하게 느껴왔던 문법 위주의 학습이 전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뢰성이 떨어져 보였다. 실제로 화자의 문법적인 오류는 청자가 받는 신뢰감의 정도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표현들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나는 내 생각이 얼마나 좁았었는지 깨닫고 나의 지평을 점점 확장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내가 간과했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영어도 결국 언어라는 점이었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에 그 목적이 있고, 서로 의사가 잘 전달된다면 그 언어는 소기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셈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소통에 있어 필요가 없는 것들은 사실 빼는 것이 오히려 소통 과정을 간략하게 만드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위의 표현들에서 생략되었던 모든 단어들은 그 유무가 의미 전달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에 더해, 내가 간과했던 두 번째 사실은 내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실 우리가 영어를 쓰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는 확률적으로만 따졌을 땐 원어민과의 대화보다는 오히려 영어가 제2외국어인 사람들과의 대화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세상에는 미국, 영국, 호주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 그리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그들은 아주 당연하게도 어휘 수준, 발음, 청해력 등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이를 고려한다면 소통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함은 정확한 문법과 문장을 구사하고 원어민의 발음을 능숙하게 따라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문장 수준과 발음을 상대방의 환경과 수준에 맞게 맞춰서 융통성 있게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외항상선을 승선한 이상 비원어민인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외국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진짜" 영어 실력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점은 정말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까지 갈 길이 먼 영어 생초보다. 미국식 영어에만 절여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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