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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Feb 05. 2023

지평이 다른 사람들

연애 못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핑계야

한 번은 여자친구와 연락을 마치고 난 어떤 친구가 제게 물었습니다.
" 형은 왜 여자친구 안 만들어?"
전 대답했죠. " 요즘엔 그저 지금처럼 안 만들고 혼자 있는 게 좋아."
" 형, 그건 애인 못 만드는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핑계야."






남의 삶은 영화, 내 삶은 다큐멘터리라고 했나요.

나의 삶은 24시간 생략 없이 내가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경험하는 수많은 일들은 무의식적으로 나의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은 사람에게는 각자 '지평'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후설은 각자의 생활세계를 지평으로서 규정하였는데, 이는 독일어로 horizont 로서, '경계선을 짓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horizein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젊은 여자가 나이 든 아저씨의 팔짱을 끼고 길을 걷는 것을 보았을 때, 누군가는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팔짱을 낀 것으로 보아 친근한 관계라는 점, 여자와 아저씨의 외모가 닮았다는 점, 연인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포함해 다양한 정보를 취합하여 그 두 사람이 부녀 관계일 것을 추정합니다. 하나의 대상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경 전체가 의식에 들어오고 의식의 작용을 통해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때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본인의 경험에 따라 부녀 관계에서 팔짱을 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 두 사람이 불륜 관계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는 서로 지평이 다른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하나가 아닌 수많은 지평이 존재합니다. 각자가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의미를 파악해 내기 때문입니다. 지평은 생활세계를 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제공해 주지만, 이와 동시에 그 사람의 경험이 갖는 한계로 인해 지평에도 경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성인이 막 되고 나서부터 다양한 연애를 해왔습니 그리고 저는 지금도 그렇듯이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 관계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 지속된 연애는 마치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이 타인을 향해 갖는 결핍의 갈망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연애를 일단락하는 이별의 순간에 저는 알게 모르게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당시 애인을 통해 저는 심적으로 크게 성숙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제 자신에게 집중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느꼈습니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좋은 추억으로 마무리 지으며 당시 여자친구와 저는 서로에게 수많은 응원의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별을 좋은 순간으로 남겨둘 수 있었던 그 경험은 저로 하여금 관계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또 다른 삶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혼자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연애할 때와는 또 다른 충만으로 나날이 제 자신을 채워나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만족스럽습니다.






 친구가 제게 던졌던 말 한마디에서 저는 서로의 '지평'이 다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친구에게 있어서 만큼은 현재 연애라는 것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또한 과거의 제 자신을 돌이켜보면 지금의 저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보고 '핑계'라는 말로 규정지었던 것 같습니다. 당최 연애를 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를 않았으니까요. 저의 지평을 갖고 타인을 재단한 셈입니다.


 후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지평의 차이가 우열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우리가 지났던 그 시간들 속 각자의 경험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생겨난 자연스러운 차이입니다. 또한, 지평을 통해서밖에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한계라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과 사람들을 내가 가진 지평만으로는 함부로 평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우물 속에서 바라보는 이 동그란 경계는 하늘의 매우 작은 일부분에 불과할 테니까 말입니다.


 헬레니즘 시대 '회의주의' 학파의 대표주자 피론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언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을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탐구를 전면 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지평은 세상을 볼 수 있는 편리한 수단임과 동시에 많은 것들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역설적인 존재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항상 '아타락시아'를 목표로 판단을 유보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지평을 넓혀가려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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