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는 자신의 총기를 목숨과도 같이 여기라고 가르친다. 전쟁터에서는 절대 자신의 총기를 잃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이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배를 타면서 목숨과도 같이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구명조끼나 구명보트 같은 것들을 떠올리셨다면 잘하셨다. 공식적으로는 그게 정답이니까. 그럼 비공식적으로는 더 중요한 게 있냐고?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인터넷'이다.
평화롭게 드라마를 보던 어느 날.
"예나, 선정이 딸이에요."
헐, 진짜??
갑자기 로딩 화면이 뜨며 멈춘다. 응? 갑자기 이게 왜 안 되는 거야. 화면 중앙에 얄궂은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머금고 있던 주스가 턱 밑으로 채 흐르기도 전에 돌아가는 운명의 톱니바퀴. 내 마음을 애간장 태우는 볼썽사나운 톱니바퀴.
톱니바퀴 너 이 자식.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열 바퀴.......... 스무 바퀴.................... 몇 바퀴를 돌아도 영상이 다시 재생될 생각을 안 한다. 안 그래도 드라마는 꼭 절정의 순간에 끝나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사실에 이미 답답함이 머리 끝까지 오르는데, 이젠 데이터 너 마저. 버퍼링 지옥이 따로 없네.
이제 예나의 뒷이야기를 끝까지 파헤치려면 내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 그냥 다시 재생될 때까지 무식하게 기다리는 것. 두 번째, 오프라인 저장을 눌러두고 다른 일을 하며 기다리는 것.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 개인적으로는 전자처럼 하염없이 주구장창 기다리는 것보다는 후자처럼 다른 일을 하면서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편이 백 배 나아 보인다.
왜냐하면 사실상 한 번 버퍼링이 시작됐다는 것은 자동차가흙구덩이에 깊숙이 빠져버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때는극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다른 말로 하자면 데이터 신호가 이미 영상을 전송받지 못할 정도로 구제불능의 지경에 이르렀기에 어떤 비장의 (또는 최후의)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예나의 뒷이야기를 지금 당장 알아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면, 그때 쓸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바로 안테나를 리셋하는 것뿐이다.
안테나를 리셋해야 하는 이유는 대충 이렇다. 이미 그쯤 되면 나뿐만 아니라 배 안의 다른 사람들도 데이터가 먹통이 된 것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배 안의 데이터 구조는 선원들 모두의 선내 와이파이가 배의 중앙 안테나의 신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각자가 나름대로 매우 극적인 순간이었을 테니 데이터 갈증이 극에 달해있는 상황임이 틀림없다. 그 극심한 가뭄에 단비를 내려줄 수 있는 건 통신장비 담당 항해사인 내가 안테나 중계기를 리셋해 보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 내가 그 드라마의 뒷부분이 궁금해서그런 것은 아니다.
그 순간만큼 나는 선내에서 가장 중요한 인터넷을 복구시키는 막대한 사명을 짊어진 어벤져스다. 죽음을 알면서도 적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언맨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두려우면서도 지독하게 고독한 이 느낌 말이다. 하지만 이 고독함은 내가 달게 감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의 이 손에 무려 누군가의 쇼츠 영상과, 다른 누군가의 카톡 메시지와, 또 다른 누군가의 인스타 피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도가 실패하면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인터넷을 수혈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 돌덩이 같은 부담감을 뒤로 한채 나는 안테나 중계기 앞에
선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다. 식은땀이 흐른다. 혹시나 리셋하다가 잘못 돼서 아예 먹통이 되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다음 항구까지 최소한 6일 동안은 인터넷이 없는 채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원성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릴지도 몰라..! 어떡하지. 그냥 리셋하지 말고 될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야, 그냥 리셋해 버려. 못 먹어도 고야!
아니, 섣불리 행동해선 안돼. 까딱했다가 고장 나면 끝이야. 그냥 리셋하지 말고 기다려보자.
너 기다릴 수 있겠어? 지금 당장 결말을 확인해보고 싶은 거 아니냐고. 선장님도 기관장님도 모든 선원들도 지금 너의 그 리셋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잖아!
어우 그래, 뭐 별 일 있겠어? 이제 고민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한 번 해보자!
손이 리셋 버튼을 향한다.
딸-깍.
안테나가 위성을 다시 초기화하기 시작한다. 정상 트레킹을 하게 되면 위성 신호 강도가 화면상에서 올라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50.. 70.. 100..
안테나 강도 수치가 120 쯤에 도달했을 때에서야 과연 이번 시도가 효과가 있었는가 판단해 볼 수 있다.
115.. 120!
정상적으로 작동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알파벳 'a'을 구글에 검색해 본다.
구글 로고에 이어 'a'에 대한 통합검색 결과가 하나둘씩 스마트폰 화면에 나타날 때쯤, 나는 이번 시도가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숨을 돌린다.
사경을 헤맸던 사람들이 인터넷을 수혈하면서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이 배의 평화를 지켰다.. 는 식으로 자기 위로를 하며 예나의 안위를 살피러 방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리셋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테나 상태가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경우엔 어떻게 될까? 유튜브나 인스타는 고사하고 카톡 한 개조차도 전송되지 않는 상황 말이다. 아니 그 정도로 끔찍한 상황도 있냐고? 물론 입죠.
누군가와 카톡을 하고 있을 때, 특히나 그것이 연인이라면 상황이 점점 심각해진다.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 선내 인터넷이 잘 안 될 때에도 메시지를 읽으면 상대방 핸드폰에서 1이 사라지기는 한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답장을 보내려면 보내지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가끔 심각한 오해를 초래한다. 상대방 입장에선 1은 없어졌는데 답장이 없으니 '읽씹' 당했다고 느낄 수밖에.
이 문제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카톡이 한참 진행 중일 때에 벌어지는데,
A : 그래서 자리가 여기 한 자리밖에 안 남았는데 여기 할래? 지금 인기가 많아서 할 거면 바로 해야 해!
B : (응, 그러자!)
A : ... 어디 다른 거 하러 갔나..?
B : (아냐 나 여기 있어! 바로 예약하자!)
A : 고민하고 있나 보네. 결정되면 알려줘.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게.
B : (아니야, 나 할 거라니깐!)
...
A : 자리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이 채가버렸어.. 다음에 가자!
B : (오열)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아버지가 책장 뒤에서 오열하며 딸 이름을 부르짖을 때의 느낌이 딱 이런 느낌이 아닐까? 책이 떨어지는 바람에 다행히 딸이 아버지의 존재는 알았지만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던 것처럼, 카톡의 1은 없어졌으나 메시지가 오지는 않는 이 상황은 얼마나 비극적이란 말인가.
(출처: 영화 '인터스텔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다 위에서 유튜브를 보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고 하던데, 요즘에는 그래도 육지에서 인터넷으로 하는 것은 게임을 제외하면 배에서도 어찌저찌 다 할 수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바다 위의 인터넷은 육지만큼의 속도와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런저런 애로사항이 생기게 된다. 내가 인터스텔라 주인공의 심정을 몸소 실감했던 것처럼.
이런 식으로 혜택의 변두리에서 생활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요즘에는 나름의 대처법이 생겼다. 연락을 하다가 두절되더라도 이제는 조금은 도가 텄다. 영상을 보다가 끊기더라도 '저 양반 또 시작이네' 하며 그러려니 한다. 인터넷이 끊기면 끊긴대로 인터넷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책을 읽는다거나 빨래를 갠다거나 방 청소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다른 방에 찾아가 사람들과 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인터넷이 안 되던 것은 말끔하게 잊혀진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인터넷이 안 되는 것이 생각만큼 극한의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네.
허허, 누가 들으면 인터넷이 없던 옛날 사람은 극한 상황을 견딘 외계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원래 사람은 인터넷 없어도 잘 살아져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