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우리 배가 방문하는 곳들은 중동 항구들이다. 오만, 두바이, 아부다비, 카타르, 사우디 아라비아 등등. 9월쯤 한창 더울 때 중동을 간다는 것은 마치 상어와 싸우기 위해 물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내 목숨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사망신고나 다름이 없으니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가라고 한다면 내 기꺼이 이 한 몸 바치리이다.
아무래도 들르는 곳이 많은 편이라 회사에서 구색 맞추기로 추가 수당을 조금씩 쥐어주는데 그래도 다 모아놓고 보면 그렇게 적진 않아서 월급이 들어오는 10일이 되면 회사 사람들의 살신성인 정신이 한껏 고조된다.
그렇게, 사무라이 정신을 방불케 하는 정도로 우리의 업무 욕구가 용광로만치 불타오르다가도, 머지않아 이글거리는 태양의 강렬한 자외선 공격에 사람들은 하루도 채 가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야 만다.
안 된다. 이렇게 질 수는 없어! 모두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맞서 싸워라! 우리에게는 냉동고에서 벌크업을 잔뜩 한 얼음물 군단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지 않느냐! 아직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하지만 군단의 지원사격은 도움이 되기도 잠시,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꽁꽁 얼려있던 얼음이 전부 다 녹아 없어지고야 만다. 이제 패잔병들은 그저 전의를 상실한 채 죽는 듯 마는 듯하며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실내로 들어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수밖에 없다.
막강한 무더위 앞에서 우리들의 업무 의욕은 마치 자이로드롭을 보는 것과 같다. 올라갈 때는 끙끙거리며 힘들게 올라가다가 내려갈 때는 빛의 속도로 순식간에 추락하니까 말이다.
무더위에 찌든 채 있다 보면 그때 중동에서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처음 두바이에서 상륙을 나갔을 때, 나는 예약된 사막투어를 가기 전에 두바이몰을 잠깐 들렀다. 두바이몰 내부는 밖의 더위를 농락이라도 하는 듯 엄청난 강도의 에어컨 바람을 뿜어대서 오히려 바들바들 추울 지경이었다. 시원한 실내에 들어온 순간부터 밖으로 나가기 죽도록 싫어졌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부르즈할리파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장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밖으로 향하는 문을 밀어재꼈다.
다시 닫았다. 나가려면 마음의 준비가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밖에 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저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임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멀쩡할 수가 없지. 하, 그래도 이미 마음먹은 거 나가야지 별 수 있나.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문을 밀어재낀다. 그때 이후로 기억이 없다. 그때 찍혔던 사진에서 내가 미간을 상당히 찌푸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뭔가 굉장히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사막투어 장소로 향하려면 두바이몰 앞에 오는 셔틀버스를 타야만 했다. 후텁지근함을 뚫고 픽업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차를 아직도 15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과 그쪽에 그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의 심연에 빠지고야 말았다. 사막투어를 지금에서라도 포기해야 하나 심히 고민스러웠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포기를 고민할 정도냐고 한다면, 아마 당시 내 정수리에 손을 얹어볼 수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름이 톡톡 튀길 정도로 한껏 달궈진 후라이팬 같은 내 정수리.
하지만 이런 경악스러운 환경에서도 100% 확률로 나를 사막투어에 데려갈 수 있는 마법 같은 주문이 있다. 한 번 외기만 하면 어느 누구든 없던 에너지가 바로 샘솟게 만드는 그것, 그것은 바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주문이다. (그여왔)
그여왔 주문을 쓴다면 옆에 아무리 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를 바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이 주문과 비슷한 계열의 주문으로는 '언다와' 주문이 있다. "언제 이런데 다시 와보겠냐" 주문이라고 불리는 이것 또한 마법사들의 세계에서는 그여왔 주문과 더불어 사람을 홀리는 가장 강력한 주문으로 통한다. 머글들도 쉽게 쓸 수 있는 주문이니 한 번 사용해 보시길.
하나만 해도 강력한데 그여왔 주문과 언다와 주문을 동시에 맞으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더위를 유독 못 참아하는 나를 사막까지 끌고 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사막에 도착하자마자 머리를 두르는 천인 구트라(ghutra)와 아갈(agal)을 강매당- 구매했다. 사륜 RV를 타기 전 반드시 해야 하는 절차라면서 사막에서는 이 천을 두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처음에는 안 그래도 더운데 이걸 왜 하고 있나 싶었지만, 천으로 얼굴을 칭칭 감싸면 생각보다 시원해진다. 땀을 흡수하고 증발시키면서 열을 식히는 원리인 듯하다.
아무튼, 내가 했던 사막투어는 사륜구동 RV를 몰고 사막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게 메인인 코스였다. 처음에는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사막이라는 단어 자체부터 나에게 꽤나 큰 두려움을 선사해 주었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한 번쯤은 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경험이었다. 역시나 '그여왔'은 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의 무더위가 사람이 버틸 만한 정도인가 하는 의구심은 여전하다. 중동 항로를 간다고 하니 하나같이 모두가 내게 해주던 말이 있다. 그곳은 온도는 높아도 습하진 않으니 그렇게 못 살 정도는 아닐 것이라며 오히려 한국보다 나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 한국의 더위도 습도를 고려하면 그 위력이 만만치는 않으니까 되려 중동이 더 버틸 만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머지않아 아라비안 해를 거쳐 중동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헛된 희망은 너무나도 쉽게 깨졌다. "버틸 만하기는 개뿔."
두바이, 사우디 아라비아, 카타르 등을 거치면서 기온은 40도를 웃돌았다. 체감온도 48도. 나온 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때, 나에게 중동은 건조해서 생각보다 괜찮을 거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해안가의 경우 습도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편이고, 내륙이더라도 기온이 너무 압도적이라 습도 따위는 별로 의미가 없는 듯했다. 숨이 턱- 막히는 더위. 중동은 정말 '어나더 레벨'이었다.
중동의 더위를 양껏 경험하고 한여름의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한국의 여름이 시원하다고 느꼈다. 나만 느낀 것이 아니라 이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으니 아마 꽤 보편적인 느낌이 아닐까? 한국의 여름은 생각보다 훨씬 쾌적한 편이었다. 적어도 한국의 여름은 중동처럼 목을 조르는 듯한 더위는 아니니까 말이다. 역시 우리나라만한 곳이 없는 것 같다. 이민 계획은 취하하겠다.
혹여나 두바이를 비롯한 중동 국가에 놀러 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신다면 정말 진지하게 다시 한번만 고민해 보시길 바란다. 부르즈 할리파 대신에 롯데타워 가도 충분히 즐길거리는 많다. 그럼에도 꼭 가고 싶으시다면, 그여왔 주문을 잊지 마시길. 그래도 거기까지 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