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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Oct 11. 2024

일상: 항해사인데요, 수영은 잘 못합니다

다만 이론은 빠삭해요

 수영을 할 때 몸을 움직이려면 몸에 힘을 줘야 한다. 하지만 물에 뜨려면 몸에 힘을 빼야 한다. 그런데 움직이려면 힘을 줘야 한다. 힘을 주니 가라앉는다. 다시 뜨려면 몸에 힘을 빼야 한다. 뭐 어쩌라는 거야..?


 항해사가 되려면 대학교에서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필수교양 중에 '스포츠수영'이라는 과목이 있다. 이 과목은 매주 두 시간 수업을 한 후 마지막 테스트로 평영 코스 완주를 하면 이수증을 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내 경우 이 스포츠수영이 1학년 과목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이전부터 수영에는 쥐약이라 이 과목에 상당히 큰 부담감을 안고 있었던 나는 아니나 다를까 첫날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물에 뜨는 거야 힘을 빼면 되니까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움직이려는 순간 몸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너 같은 친구 여럿 보았단다' 하는 표정으로 침착하게 대응하셨지만, 생각보다 진전이 없자 인내심을 점점 잃어가시는 듯했다.

 "다리를 양쪽으로 넓게 펴고 뒤로 힘껏 차세요."
 "자,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힘을 빼세요."

 "선생님, 힘껏 차야하나요, 힘을 빼야 하나요?"

 "힘을 뺀 채로 힘껏 차세요."

 수영은 내 적성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적응을 하지 못한 나는 수업을 몇 차례에 걸쳐 결석을 하고 나서야 이미 내가 'FAIL' 마지노선을 지날 정도로 자주 결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이후로 수업을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재수강 준비를 위해 간간이 집 앞 레포츠센터의 초급 수영 수업을 참석하면서 내가 터득한 것이 있다면 '프리사이즈 자유형' 정도가 있다. 자유형이면 자유형이지 프리사이즈 자유형이 뭐냐고? 이 수영방식은 내가 지은 이름인데, 마치 'FREE' 사이즈의 옷을 사 입었을 때 몸에 자유분방하게 피팅되는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유형이라기보단 그냥 자유분방하게 손발을 휘젓는 FREE 사이즈 영법 되시겠다. 물론 거기서 선생님은 이렇게 가르쳐주신 적이 전혀 없으므로 그분 잘못은 아니니 욕을 하신다면 전부 제게 해주시길. 그래도 나름 자유형과 생김새는 비슷하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힘이 300% 정도는 더 들어간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라고 하겠다.

 내가 이 영법을 대중에 처음 공개한 것은 2학년 해상생존훈련 때였다. SSU 해난구조대 대원 분들께서 직접 훈련시켜 주시는 형태였는데, 그중에 '물개'라는 별명을 가진 대원 분께서 직접 수영장에서 영법 체크를 해주시던 때였다.

 풍-덩

 내 차례가 되어 레인에 들어가자마자 물개 대원은 출발 신호를 울렸다. 나는 몸소 터득한 프리사이즈 자유형으로 앞을 향해 손과 발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정신없이 물밑을 오가던 중이라 전체적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발구르기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천장을 뚫을 듯 높이 솟구쳐 내 머리를 때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찌어찌 정해진 코스를 완주하고 나서 머리를 들쳐 올리자 물개 대원은 경이로운 광경을 본 양 놀란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 세상 살면서 이렇게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수영은 처음 보네."






 그럼 그런 '무식한' 수영 실력으로 어떻게 재수강을 이수할 수 있었냐고?

 내가 수영을 재수강하던 4학년 때는 코로나가 극성이던 때였다. 그때는 전국적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절대 통학시키지 못하도록 지침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국립대인 우리 학교도 위에서 내려온 그 지침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다. 말로 꺼내기 부끄러워서 안 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그때 재수강을 이수한 이후로 나는 평영과 접영의 장단점을 이론적으로 술술 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수영 괴짜인 나에게 한 가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이 있다. 항해사에게 수영 실력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배 안에는 곳곳에 구명조끼가 비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배라는 곳은 국제 규정 상 반드시 방마다 방수복을 비롯한 구명조끼가 비치되어 있어야 하고, 항해사가 주로 일하는 브릿지(항해기기를 사용하여 항해를 하는 공간)에도 마찬가지다. 구명조끼만 있다면 사실 물 위에 떠 있는 것에 문제가 없으므로 수영을 하지 못해도 괜찮다.

 두 번째는 사실 수영은 차라리 안 하는 편이 백배 낫기 때문이다. 아니, 혹시나 배가 가라앉아서 바다에 빠지면 당연히 수영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수영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맞다.

 바다에 빠지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위치를 주변에 알리는 것과 구조자가 올 때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배에는 조난 시 조난위치를 주변에 알릴 수 있는 장치들이 이중삼중으로 구비되어 있다. 하지만 혹시나 조난 위치를 실시간으로 주변에 알리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디로 괜히 이동하는 것보다 제자리에 있는 편이 구조자 입장에서 우리의 위치를 예측하기 쉽다.

 거기다가 수영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 몸에서는 매우 많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기 시작하므로, 구조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조난 상황에서 수영을 한다는 것은 괜히 나의 생존 확률을 줄이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체로 선원들이 조난당하는 위치는 육지까지 일반인이 수영을 해서 닿을 만한 정도일리가 없다. 그러니 육지로 가겠답시고 그 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수영을 하겠다는 것은 괜히 자신을 더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항해사에게는 굳이 수영이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수영이 독이 될 수도 있다.

 이제까지 항해사에게 수영이 생각보다 필요없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았다. 어째 수영실력은 늘지를 않고 말만 청산유수냐고? 그러게 말이다. 그렇게 주구장창 재수강까지 하며 수영에 시간을 쏟았거늘. 음, 일단 뭐라도 늘긴 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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