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20년 넘게 육지에서만 살아오던 청년이 바다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겪은 삶의 변화 중에 ⾐(의류)와 관련된 이야기다.
⾐: 육지에서
육지의 나는 옷정리를 할 때마다 꼭 불가피한 내적 갈등을 겪는 일이 잦았다. 자주 입는 옷이나 전혀 안 입는 옷들은 별로 문제가 안 되었다. 자주 입는 건 계속 입으면 되고, 전혀 안 입는 건 버리면 그만이니까. 문제가 되는 옷은 안 입자니 아깝고 입자니 손이 안 가는, 그런 애매한 포지션의 옷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당당하게 장롱 속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면서 당최 집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옷들을 입긴 입었냐고? 그게 더 문제다. 결국 한 번도 입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내게 갖가지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준 것도 모자라, 결국 아무런 쓰임도 되지 않고 쓸데없이 공간만을 더 차지하는 메인 빌런들이 된 것이다. 법정 스님께서 이들의 존재를 들으셨다면 분명 혀를 끌끌 차셨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집을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다. 혹시 모르니까. 이 갈색 가디건은 최근 3년 간 입어 본 적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 흰색 자켓은 작년에 한 번 입고 말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 아이보리 코트는 올해 들어 딱 한 번 입고 말았지만 혹시 모르니까. 혹시나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이 쓸데없는 생각. 이 생각이 제일 문제다.
이 생각은 배에 승선할 때에도 지긋지긋하게 나를 쫓아다녔다. 이제는 옷뿐만 아니라 갖가지 생활용품도 합세했다.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던 알로에젤, 한 번도 써본 적 없던 텀블러와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기억도 안 나는 책향수까지. '혹시 모르니까' 캐리어에 담겼던 처음 그 순간부터 승선하는 5개월 동안 그대로 캐리어 속에 처박혀 있다가 하선날 그 상태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헬스 할 때 무게 올리는 원판 정도의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했다.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앞으로도 계속 터무니없는 무게의 캐리어를 몰고 다니며 스트레스에 짓눌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 바다에서
배에는 저승사자가 자주 출몰한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의 복장은 검은색이기도 하고 자주색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요즘 시대에 발맞추어 짚신이 아닌 검은색 크록스를 신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검은색 티셔츠, 검은색 바지에 검은색 크록스. 배에 있는 대부분의 선원들은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블랙 패션을 고수한다. 이게 바로 그들이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다. 그렇다면 선원들이 그토록 올블랙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오염이 되더라도 티가 잘 안 나기 때문이다. 배의 곳곳에는 윤활유나 각종 기름이 묻어있는 지뢰들이 심심찮게 존재한다. 혹여나 색이 있는 밝은 옷을 입고 있다가 어딘가에 까만색 윤활유가 묻는 날엔 그거 하나 지운다고 하루종일 세제에 문대며 궁시렁대고 있을지 모른다.
두 번째는 여기저기에 입기 무난하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배에서 굳이 누구한테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것을 굉장히 귀찮아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단연 검은색은 여기저기 입기 좋은 완벽한 올라운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그들과 같은 저승사자가 되고자 한다면 단순히 색깔만 올블랙으로 맞추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올블랙에는 필수조건이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극강의 가성비'다. 그들은 단순한 검은색 의류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가장 가성비 좋은 옷을 찾을 때까지 여러 사이트에서 여러 상품을 구입해 보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
그들이 굳이 이렇게까지 '극강의 가성비'에 집착하는 이유는 배에서 쓰는 물과 관련이 있다. 배에서 세면대나 세탁기에 쓰이는 물은 물탱크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가져다 쓰는 방식이다. 이때, 물탱크가 철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물을 아무리 정제를 하더라도 금속물질이 안에 남아있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옷들이 빨리 상해서 오래 입지 못하게 된다. 이런 변질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 선원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낮은 가격의 옷을 입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배에서 겪은 오랜 기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검은색이면서 가성비가 좋은 옷들이 배에서 입기에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하나의 통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검은색인데 심지어 싼 가격에 구매한 옷이라 그런 걸까? 검은색 옷들은 배에서 세탁을 한 번 할 때마다 군데군데 검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반점은 세탁을 거듭할 때마다 커지고 커지면서 옷 전체를 점차 불그스름하게 변색시킨다. 이 과정을 몇 달간 반복하게 되면 검은색이었던 옷은 마치 포도처럼 짙은 자주색 빛깔을 띠게 된다.
이렇게 변색을 거듭하여 자줏빛이 된 저승사자들은 그 옷의 색깔이 승선경력이 꽤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방증해 준다. 그들은 이제 슬슬 정해진 승선일수를 채웠고 휴가를 셀 타이밍이 된 것이다.
이 저승사자들은 하선할 때쯤 변색과 변질을 거듭한 자주색 옷들을 통째로 폐기처분한다. 그리고 휴가를 세고 나면 자신들이 구매했던 똑같은 제품을 사들고 다음 배에 올라 다시 저승사자가 된다.
물론 배를 승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똑같은 자색 저승사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저승사자로서의 생활은 여태 애매한 물건을 포기하지 못하던 나에게 여러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미 다 쓴 옷은 하선과 동시에 모두 폐기처분하는 과감함이 그 첫 번째다. 결국 옷은 소모품일 뿐이고한때 잘 입었으면 그만인 것을 승선을 하고서야 제대로 체감했다. 애매하게 무언가를 붙들고 있지 않고 보낼 때는 보낼 줄 아는 그 단호함은 내가 바다에서 새로이 배웠던 소중한 깨달음 중 하나다.
입지 않는 옷이나 쓰지 않는 물건에 대한 애매한 집착을 버리게 된 것이 두 번째다. '혹시 모르니까' 꾸역꾸역 캐리어에 집어넣었던 옷가지들은 검은색 옷들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기 시작한 후에서야 그 불필요함이 확실히 피부에 와닿게 되었다. 그 후로 이러한 깨달음은 옷뿐만 아니라 물건에까지 확장되었고, 이로 인해 내 캐리어는 훨씬 가벼워졌으며 덤으로 불필요한 충동 소비 또한 줄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안다. 적어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물건에 있어서는 '혹시 모를'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옷을 입지 않을 것이고, 이 물건을 쓰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쓰레기통이 더 무거워졌다. 나는 훨씬 가벼워졌다. 캐리어도, 내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