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월성에 오를 시간. 월성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친구 녀석들이랑 1박2일 일정으로 이모가 사시는 경주로 놀러 갔다. 고등학생들이 경주 유적에 대해 뭔 관심이 있었겠나. 그래도 처음으로 불국사도 가고, 석굴암도 갔다. 이모네서 밤새 고스톱도 치고. 재밌었다.
다음 날 아침, 안압지랑 박물관 들렀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 월성에 올랐다. 근데 이건 뭐지? 한겨울이라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칼바람만 얼굴을 때리는 황량한 허허벌판. 다들 괜히 왔다며 궁시렁거리며 내려갔다. 근데 왜일까? 아직도 그때의 여행을 생각하면 월성의 그 을씨년스런 풍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뭐가 그리 인상적이었던 걸까?
지금의 월성도 그때와 별 차이가 없다. 성벽돌 사이로 잡초와 아름드리 나무들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고, 인위적으로 정비되어 있지도 않다. 심지어 복원된 건물도 하나 없다. 말 그대로 폐허. 그래서 좋다. 마음껏 상상할 수있어서 좋다. 내 맘대로 그 옛날의 영화로운 궁궐을 지어볼 수 있어 좋다. 그냥 남천을 보면서 조용히 산책할 수 있어 좋다. 스물살도 안된 어린 나이였음에도 내가 그 때의 월성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은 그런 상상할 수 있는 자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작년에 갔더니 입구에 이상한 플랜카드가 달려 있었다. ‘축 경주 월성 복원’ 헐~~~ 이게 정말 축하할 일일까. 월정교도 정확한 고증없이 복원하고, 황룡사도 다시 짓는다더니 월성까지. 제발 좀 내버려주자. 폐허는 폐허로 남아있을 때 아름다운 것 아닐까.
월성을 내려 와서 길을 건너면 바로 안압지. 이곳은 원래 왕족의 정원이자 태자가 지내던 동궁이었다. <삼국사기>에 674년에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전각을 짓고 정원을 꾸몄으며, 679년에는 경내에 동궁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신라가 망한 후 늪지로 변한 호수 위로 기러기(안)와 오리들(압)이 떼 지어 노는 장면을 본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지었다고 한다(사실 이제는 정식명칭인 '동궁과 월지'라고 불러야하는데도, 난 여전히 안압지란 이름이 훨씬 더 정이 간다).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던 안압지는 1975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다수의 건물지와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결과를 토대로 1980년대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지금 있는 세 동의 전각이 그때 복원된 것들이다(몽땅 다 복원했음 답답했을 텐데, 이 정도에서 그쳐 딱 좋다).
최근에 야간조명이 설치되면서 안압지는 경주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된 듯하다. 실제로 색색의 조명을 받은 전각들은 황홀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그것만 보고 간다는 것. 시간을 좀 만 더 투자해 호수 전체를 한바퀴 다 돌아보시라. 그래야 시시각각 변화하는 아름다운 경치와 나무들과 전각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우선 서쪽 전각에서 바라보는 동쪽 호안은 나무와 화초들이 심겨 있고 불규칙한 석축으로 구불구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아래 왼쪽 사진). 그러나 동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뒤돌았을 때 보이는 서쪽 호안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일정한 크기의 석재들을 정연하게 쌓아 직선의 축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전각들을 지었다. 지극히나 인공적인 모습(아래 오른쪽 사진).
그리고 좀 더 걸어가다 보면 이 두 가지의 상반된 미감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기가 막힌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안압지는 통일신라 건축과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인 인공과 자연의 조화와 통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모습은 100여 년 뒤 석굴암과 불국사에서 더욱 완벽한 형태로 구현된다).
게다가 호수 동남쪽 구석에서 있는 유적을 봐야 안압지를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입수구. 거북이 등을 음각한 것 같은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유구였다. 오래전에 왔을 때는 물이 말라 있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실제로 호수로 물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천 오백년 전 신라의 왕족들이 삼한을 통합하고 당나라를 몰아낸 후, 배 띄우고 여흥을 즐길 때도 이런 식으로 호수로 물이 흘러들어 갔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