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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섭코 May 08. 2020

죽을지도 모르니까 집 정리를 하자

 


 가끔 '언젠가 죽을 텐데, 열심히 살아서 무엇하나.'라는 생각을 한다.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돈을 벌고, 집을 마련하고, 건강을 챙기고,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가는  인생을 채우는 모든 활동들이 결국은 죽음에 수렴한다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죽음을 중심에 놓고 생을 표현할 , 그나마 우아한 표현이 '생은 결국 죽음에 수렴한다'   같다. 그렇다 해도 어차피 죽을  하루하루 하고 싶은   하면서 살지 저축이  뭐야, 라면서 살기에는 너무 대책 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무병장수할 거라는 믿음으로, 오래 살면서 필요하게  여러 가지 것들(a.k.a. 노후대책) 마련하기 위해 빽빽하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극단적인   태도 사이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언젠가 맞이하게  죽음이라는 마침표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물을 좋아하지만 물에 빠져 죽는건 고통스러울 것 같아 싫다



 어떻게 대할지는 모르겠지만, 죽음과 관련해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습관이 하나 있다. 현관을 나서기 전 집을 정리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쌩뚱맞거나 혹은 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내겐 나름의 역사가 있는 습관이다.


 고등학생 시절 심부름을 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의 차를 탔던 적이 있다. 담임 선생님의 차가 새 차처럼 굉장히 깨끗하고 차 안의 물건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와 선생님 차 정말 깨끗하시네요!'라고 감탄하자, 선생님은 '내가 지금 떠난 이 자리가 내 마지막 자리로 기억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늘 잘 정리해두곤 한단다.'라고 말씀하셨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고등학생이 소화하기엔 꽤나 묵직하고 또 어두운 말이었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단순하게 정말 멋진 어른의 태도라고 생각했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생님의 (아마 의도치 않았을) 그 가르침은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특히 외출을 위해 현관문을 나설 때 자주 생각난다. 그래서 현관문이 닫힌 직후일지라도 그 말이 생각 나면, 다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 내 마지막 장소로 남겨져도 괜찮은 수준으로 정돈해두곤 한다. 어질러진 책상 위, 칠렐레 팔렐레 널브러져 있는 이부자리나 옷가지, 쌓여있는 설거지 감들이 주로 정리의 대상이다.



다른 누군가는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고 있을까. 내 죽음이 아닌 다른 이의 죽음을 나는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내가 죽기 전 경험하게 될 타인의 죽음은 또 다른 세계다. 편하게 묻기 어려운 이야기들이기에 꾹꾹 매번 일기장에나 눌러담게 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까지 죽음을 향한 내 생각은 이렇다. 갑자기 찾아온다면 무진장 억울한 것. 그리고 그동안 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자리들을 나서기 전 늘 정돈하게 되는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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