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언젠가 죽을 텐데, 열심히 살아서 무엇하나.'라는 생각을 한다.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돈을 벌고, 집을 마련하고, 건강을 챙기고,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가는 등 인생을 채우는 모든 활동들이 결국은 죽음에 수렴한다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죽음을 중심에 놓고 생을 표현할 때, 그나마 우아한 표현이 '생은 결국 죽음에 수렴한다' 인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어차피 죽을 거 하루하루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지 저축이 다 뭐야, 라면서 살기에는 너무 대책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또 무병장수할 거라는 믿음으로, 오래 살면서 필요하게 될 여러 가지 것들(a.k.a. 노후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빽빽하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극단적인 이 두 태도 사이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이라는 마침표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대할지는 모르겠지만, 죽음과 관련해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습관이 하나 있다. 현관을 나서기 전 집을 정리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쌩뚱맞거나 혹은 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내겐 나름의 역사가 있는 습관이다.
고등학생 시절 심부름을 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의 차를 탔던 적이 있다. 담임 선생님의 차가 새 차처럼 굉장히 깨끗하고 차 안의 물건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와 선생님 차 정말 깨끗하시네요!'라고 감탄하자, 선생님은 '내가 지금 떠난 이 자리가 내 마지막 자리로 기억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늘 잘 정리해두곤 한단다.'라고 말씀하셨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고등학생이 소화하기엔 꽤나 묵직하고 또 어두운 말이었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단순하게 정말 멋진 어른의 태도라고 생각했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생님의 (아마 의도치 않았을) 그 가르침은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특히 외출을 위해 현관문을 나설 때 자주 생각난다. 그래서 현관문이 닫힌 직후일지라도 그 말이 생각 나면, 다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 내 마지막 장소로 남겨져도 괜찮은 수준으로 정돈해두곤 한다. 어질러진 책상 위, 칠렐레 팔렐레 널브러져 있는 이부자리나 옷가지, 쌓여있는 설거지 감들이 주로 정리의 대상이다.
다른 누군가는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고 있을까. 내 죽음이 아닌 다른 이의 죽음을 나는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내가 죽기 전 경험하게 될 타인의 죽음은 또 다른 세계다. 편하게 묻기 어려운 이야기들이기에 꾹꾹 매번 일기장에나 눌러담게 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까지 죽음을 향한 내 생각은 이렇다. 갑자기 찾아온다면 무진장 억울한 것. 그리고 그동안 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자리들을 나서기 전 늘 정돈하게 되는 그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