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 by. 박찬욱
인간은 어려서부터 실수를 한다. 실수를 하더라도 수습하고, 재발을 방지하며 반성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수가 더 이상 실수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대부분은 덮어버리는 방향으로 갈지도 모른다. 내가 한 일이지만 그저 모른 척 넘어간다. 하지만 실수의 범위가 더 이상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라면 우리는 반성을 하고, 속죄를 택한다. 그러나 반성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속죄를 받는 방식도 모두 어려운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 속죄받을 것이며, 누구에게 구원받을 것인가.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바로 금자라는 인물의 씁쓸한 속죄와 구원받지 못한 인생을 조명하며 비극을 상기시킨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영화이다. 첫 번째 복수는 나의 것, 두 번째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박찬욱의 복수는 연속성,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관계의 복합성에서 끝맺음으로 복수라는 방식과 그들의 겪게 될 운명을 집중했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는 마지막 시리즈답게 복수라는 과정과 결과보다 복수를 통해 얻게 되는 속죄의 길에 대한 물음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매번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다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용서를 구할 수 없을 만큼 큰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죄해야 할까. 말로는 더 이상 꺼낼 수 없는 표현을 꼽씹으며 살다가 침묵해 버린다. 하지만 금자씨는 달랐다. 그녀는 복수와 속죄 그리고 구원을 이루고자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녀의 원하는 구원이 올바른 것이냐에 대해서 묻는다면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도덕적인 가치성을 따질 수 있는 범주는 이미 넘어섰다. 오로지 그녀에게 남은 것은 속죄받을 복수만이 전부니까. 원모라는 아이와 그의 부모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딸을 입양시킨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한 신념 같은 것이다. 특히나 영화 초반에 성녀의 이미지처럼 보여준 금자의 모습과 기도하는 태도는 어쩌면 진실 일 수 있다. 그녀의 성품과 종교라는 존재를 통해 버티려는 의지. 그것은 신을 향한 태도보다는 신과 비슷한 자신의 계획을 믿고 따른다.
그만큼 이금자의 삶은 오로지 계획을 실현시키고자 종교처럼 믿고 있는 복수의 길만이 남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를 바쳐서라도 말이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의 애달픈 기도는 참으로 애석하다. 그만큼 절실했지만 그 복수의 끝이 정확하게 어떤 길로 이어질지 모르니까 말이다. 구원이라는 길로 갔다면 관객 모두는 금자의 복수를 응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금자의 복수를 구원으로 연결 짓는 엔딩을 내지 않는다. 끝내 복수를 성공해도 얻지 못한 불안정한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게 만든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다. 이금자라는 복수를 통해 실수를 없던 것으로 돌리려는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속죄와 구원은 어떻게 해서 도달할 수 있을까? 삶이 전부 미지수 같아서 헤매는 우리의 모습을 반사시킨 것과 비슷하다. 차라리 우리가 실수를 하지 않는 완벽한 생을 살아가면 모를까. 결국 겪는 수많은 과정들의 하나에 집착하고 매달릴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실수한 삶을 되돌아보지만, 동시에 반성하고 의미를 곱씹으며 자신을 넘어서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 정도로 덮어지지 못하는 실수도 많다. 마치 영화 친절한 금자씨처럼 인생이 헝클어져서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해진 인생의 일부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수를 되돌릴 수 없다. 실수를 딛고 넘어서서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마지막 내레이션을 떠올린다. “이금자는 어려서 큰 실수를 했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영혼을 구원을 끝내 얻지 못했다.” 얻지 못한 구원은 이금자가 자신의 실수를 딛고 넘어선 것이 아닌 자신의 실수를 없애려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하얀 케이크 위에 얼굴을 파묻힌 채 슬프게 울던 금자를 또 떠올린다. 그녀는 삶의 기도마저 잃어버려서 마주할 비극의 슬픔을 직면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에 속죄와 구원이라는 이름을 찾고자 선택한 복수는 그녀의 삶에 비하면 말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얻지 못할 의미를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