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by. 웨스앤더슨
우리는 종종 기억 속에 매몰되었던 순간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꺼내진 과거는 후회, 정말, 분노, 환희, 그리움 등의 여러 감정으로 이끌어간다. 기억의 순간을 거치다 보면 과거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지는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쓸쓸한 과정으로 감정이 매몰된다. 그럼에도 사람은 기억을 매 순간 끄집어내어 동화처럼 읽어간다. 화려하게 색칠한 배경색과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던 기억을 편집한다. 물론 위험했던 순간과 절정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장치를 미리 취해두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나만의 과거를 위한 동화는 나를 여행하듯 흘러가게 만든다. 그러한 추억은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렇게 순간의 그리움은 나의 다음을 위한 회복제로서 사용된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과거의 동경과 그리움을 사람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시각적인 요소를 이용해 그려낸 영화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에 미장센이 완벽할 정도로 아름답다. 배우들의 동선이 모두 짜 맞춰져서 연극 같기도 하다. 연출적인 카메라의 구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에게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는 그런 것이다. 과거는 분명 시궁창일 수 있다. 전쟁과 고아의 인생은 지운다. 대신 내가 가장 아끼고 싶은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한다. 분홍색으로 칠한 벽과 알프스 산맥처럼 높은 꼭대기에 한 채 밖에 없는 완벽한 호텔의 정서를 기반으로 나의 세계를 간직한다.
이렇게 연출된 과거를 직면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라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을 수 있다. 나의 대답은 “모른다.”이다. 과거부터 항상 많은 이들은 과거를 직접 직면하고 내면의 나와 싸워야 한다. 끝내 이겨낸 나를 바탕으로 한층 더 성장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한 말에 따라 많은 이들은 과거의 나를 이겨내면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과거를 직면하고, 이겨낸다면 인간의 삶을 더 나은 과정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나 실수도 하고, 부조리한 일에 고통받기도 한다. 혹은 누군가의 죽음에 탄식하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 모두를 이겨내라는 것은 어쩌면 너무 잔혹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그러한 과정을 모두 이겨낼 수 없기에 과거의 순간을 그리움으로 변칙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주인공 제로는 과거를 인식할 때 구스타브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분리한다. 그의 세계는 이미 과거 속에 있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는 현재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머물러 있다. 구스타브의 기억은 이미 호텔에서 자신과 같이 행동하고, 이어왔기에 그 두 관계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 아가사와의 짧은 순간은 자신과의 연대 속에 머무를 수 없기에 호텔을 사들이고, 그곳에서 자신의 과거를 되짚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제로는 구스타브라는 과거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다. 아가사라는 과거를 간직하고자 호텔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이것도 제로가 가진 기억의 변칙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영화에서 마지막은 어느 유명 소설에 의해 다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얽힌 사건은 이야기로 완성된다. 그리고 소설을 본 많은 이들은 그리움을 공유하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억은 제로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모든 독자들마저 제로가 간직해 온 기억을 공유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받아들인다. 결국 영화에서 우리의 시각적인 면을 자극하고, 강조한 것은 우리가 그리움을 독자들이 받아들이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리움이라는 것은 기억의 이기심일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나아가야 할 과거의 전복에서 벗어나 새로운 과거를 마주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 그리움으로 포장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앞서 말한 대로 기억을 이겨내고 사는 인간도 별로 없다. 또 다르게 말하면 그리움만으로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웨스 앤더슨에게 노스탤지어처럼 흘러가는 순간의 포착은 나쁜 것인 아니기에 한 번쯤은 자신을 돌아본다. 아련한 나를 마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화려하게 꾸며진 분홍색의 알프스 산맥 꼭대기에 위치한 완벽한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의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