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 by. 리들리 스콧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신을 믿고, 따른다. 신이라는 존재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절대성에 의지한다. 신은 그런 자신을 믿는 이들 위에 바탕으로 세워졌다. 그런 신을 위한 종교는 세상을 구원하고 수호하는 보이지 않는 역할과 책무를 이행한다. 그렇기에 신이 있는 종교는 인간을 믿음으로 탄생하였다.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가 단 하나뿐일 수 없다. 믿는 이들이 각기 다른 믿음으로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이라는 존재는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신이 옳기에 신을 기반으로 세상을 뻗어가는 자들이 넘쳐난다. 역사의 기록된 11세기부터 13세기의 십자군 전쟁이 그중 하나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종교를 기반으로 일어난 십자군 전쟁의 서사를 기반으로 영화를 진행시킨다. 종교라는 믿음으로 각자의 싸움을 진행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종교는 그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신을 기반으로 한 믿음에 의해 전쟁을 수행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신을 끌어들인다. 그렇게 각자의 신은 전쟁에 명분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얻게 되는 부와 명성 그리고 권력은 신을 수호한다는 목적으로 얻게 된다. 이런 모습은 종교의 순수성을 더럽힌 타락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 자체가 그 시대의 문화였던 역사를 생각해 본다. 종교로 인해 일으킨 전쟁은 신성함 동시에 각기 다른 문명의 출동이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종교적인 관점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종교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과 전쟁의 서사를 중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신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이유로 두지 않는다. 신이라는 존재의 모습을 두고 경계로 그어진 문명의 차이가 상대를 죽여야 할 이유가 되었다. 종교적인 신성함은 눈앞에 필요한 기적을 보여줄 수단이지 본질이 아니었다. 오로지 예루살렘이라는 성지의 회복이라고 부르짖는 자들의 모습에는 더 이상 신을 향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를 재해석한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관점은 흥미로웠다.
다만, 영화는 역사였지만 역사의 과정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영화에서 보여준 예루살렘의 의미를 생각하면 무의미한 전쟁이다. 혹은 권력자와 문명의 충돌로서 나타낸 결과였다. 하지만 현대에서도 여전히 예루살렘의 의미는 반복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아무것도 아닌 종교의 신성함을 바탕으로 무고한 살육을 일으킨다. 오히려 종교라는 이름이 도구화되어 극단적인 사태를 일으킨다. 반복되는 과정에 지쳐가는 일반인들의 슬픔은 누구도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종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면 모든 것이 통용된다고 믿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믿는 신이라는 존재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매번 믿는 신은 우리에게 구원자이고, 일종의 도덕적인 잣대이다.
매 순간이 믿는 신을 향해 자신의 양심을 공고히 다지고, 삶을 실존하도록 도움을 주도록 신을 믿어야 한다. 신이라는 존재의 부름으로 영지를 회복하거나 자신들의 공포심을 유발하도록 자행하지 않는다. 무차별한 테러의 반복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운명을 신의 이름으로 관장시킨다면 부조리한 역설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삶의 비극을 마주하고 있기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선택을 돌이켜 봤으면 한다.
이슬람교를 믿는 살라딘도 기독교를 믿는 발리앙도 마지막에서 운명을 결정한 것은 신의 결정이 아니었다. 오로지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합의하고, 관련 없는 사람을 지키는 선택을 자행한다.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종교적인 의미는 없는 태도로 결정된 결과에 만족한다. 결국 신이 존재한다며 자행했던 모든 것이 잔혹한 과정은 인간이 내린 결정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결정한다면 비극도 멈출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의미를 남긴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모든 것이기도 한 예루살렘을 보면서 생각을 공고히 다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