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야 Apr 08. 2021

데어 윌 비 블러드

by. 폴 토마스 앤더슨

데어 윌 비 블러드 (2007)

PTA의 영화는 누구보다도 인간 자체의 영화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나의 성공이 전부였으며 성공한 것을 쥐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가족도, 신념도, 영혼도 상관없다. 성공에 미쳐버린 자신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플레인뷰는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서 악착같이 성공을 바라던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도 역시 끔찍하다. 자신들의 노력만큼 성공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극적인 조건에는 수많은 갈등을 넘어야만 했다. 


자신이 소중하다고 믿는 것을 버려야 한다. 자신의 우월했으며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끝내 얻어낸 성공 뒤에 추악하게 남은 자신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해내고 얻어낸 성공은 달콤했다. 혼자만의 힘으로 미국이라는 땅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스스로 가족을 부르짖으며 혈육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혈육은 혼자가 아니라는 자기 암시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혼자였고,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극적인 시대상을 담아낸 영화이다. 미국의 초창기 서부의 황무지에서 금광과 석유를 찾아서 부자가 되려는 이들이 여행을 다닌다. 그들에게는 단 하나의 목적만이 남아있다. 성공해서 부를 얻는 것이다. 플레인뷰 또한 그런 인물 중에 하나였다. 처음에는 혼자 금광을 그리고 석유를 찾아 악착같이 버텨낸다. 점차 유전을 찾아낸 돈을 벌기 시작한 플레인 뷰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사업을 넓혀간다. 유전이 있는 땅을 알게 되고 그는 투자를 시도한다. 


하지만 사이비 교회의 수장으로 또 다른 욕망을 품은 일레인과 만남은 달갑지 않다. 삐걱되었지만 석유사업은 시작되었고, 그는 결국 석유를 찾아낸다. 하지만 아들이 석유를 찾아내던 중에 사고를 당한다. 점차 그에게는 갈등이 주어진다. 이대로 얻게 될 성공과 존경을 받을 인물로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보상에 손을 뻗고 성공을 버릴 것인가? 영화는 주인공이 가질 성공의 길과 파멸할 자신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성공이라는 것은 언제나 달콤하다. 나를 모르는 사람조차도 굴복시킬 수 있다. 혹은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셀 수 없는 부는 나를 감동시킨다. 그만큼 내가 얻을 가치를 따져본다면 성공을 포기할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성공에 조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나의 성공을 막아서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은 물론이다. 나의 가족도 방해가 된다면 물론 치워야 한다. 가끔씩 찾아오는 부랑자의 거짓말에는 응징한다. 위선자의 속사임은 성공을 위해 욕망을 감춘다. 


그렇게 자신을 파멸시킬 때가 진정으로 성공한 나 자신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얻은 성공에는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 성공 자체만을 향해 달려 나가는 욕망뿐이다. 폭주기관차처럼 달려 나간 그에게 성공은 부와 명예가 아니다. 자신의 주변마저도 부수고 무너뜨리는 것이 성공이 된다. 결국 성공을 위해 쌓아 온 그의 업적은 성공을 목표로 한 업적으로 변한다. 이제 플레인뷰에게 성공은 곧 인생이 되어있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성공을 위해 달려온 우리들의 사회를 돌아봤다. 경쟁체제에 휘말려서 성공에만 목숨을 걸어야 했다.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추락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였다. 어떤 이는 성공의 저편으로 떠나버렸다. 우리는 가끔 그를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속으로 삭힐 뿐이다. 하지만 인생을 멈추지 않고 달려갔던 자들의 성공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성공한 자의 자리가 내 것이 되어야 한다는 헛된 욕망과 함께 레이스를 다시 시작된다. 


영화는 그렇게 성공이라는 목표 지향점을 품은 인간 승리적인 면모가 성공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파멸로 나아가는 현실을 선보인다. 무엇이 옳다고 대답할 수 없다. 인생에 있어 누구나 선택할 권리는 존재한다. 성공을 위해 자기 파멸을 할 지라도 얻어내고 싶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한 번의 결정으로 모든 것이 끝날 때가 많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의 생은 이미 끝나버린다. 


그렇다고 영화가 도덕적 관념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 관념을 제거한 채 달려 나간 인간의 욕망에 집중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성을 찾아 나선 영화라고 생각했다. 폭력을 통해 만들어진 미국의 역사처럼 아메리카 드림을 위해 빈민층에서 시작해온 이들에게 성공을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미국처럼 참혹하고 광대한 폭력을 사용했고, 겉표면으로는 강성하지만 내부에는 여전히 남겨진 문제들을 품고 성공에 도달한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결말에 대사처럼 성공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아무것도 정의 내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완벽한 결말을 가졌다. 덧붙여진 말 대신에 인간에 존재를 조명했던 PTA 답게 말이다. 


점수 : 5.0 / 5.0

매거진의 이전글 다우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