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패트릭 샌리
오랜만에 보는 종교영화이자 사람들에게는 잊힌 것 같은 영화였다 특히나 우연히 왓챠에서 감상하고 홀리듯이 느낀 단평을 작성할 수 있어서 더 좋았던 영화 다우트
영화 다우트는 종교에 대한 영화이다. 가톨릭교를 믿는 신부와 수녀 그리고 카톨릭계의 학교 내부에서 벌어지는 의심에 대한 영화이다. 다만 1960년대라는 미국의 시대적인 상황을 전개로 보여준다. 보수적인 측면과 진보적인 양측을 갈라서 의심하고, 경계하듯이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마저도 '다우트' 스럽다. 그 이유는 종교에 귀의해서 신을 위해 복종해야 하는 신부가 의심스럽다. 수녀원장의 강압적이고도 숨겨진 모습들이 궁금하다. 그리고 종교에 귀의한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 영화는 이 모든 것에 의심을 불러온다. 그러나 의심 던진 건 수녀원장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이제 막 수녀가 되었던 제임스 수녀의 물음이 가져온 결과였다.
영화 다우트는 교회의 타락한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마지막까지도 교회의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적인 수녀를 다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의 문화와 태도를 바꾸려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신부에게도 그러한 기회는 주어진다. 이미 변해버린 사회에서 갈팡질팡하거나 인종과 계급적인 면모를 넘어서야 할 문제에 직면한 사회를 향한 신부의 외침의 시대의 문제를 전파했다.
흑인도 가톨릭 학교에 다니고, 신부가 될 수 있는 미국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시대의 고발이었다. 이렇게 보면 과연 신부는 정의를 내세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부의 잘못된 행위를 결국 고백하게 만든 결말을 보면 우리는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다.
특히 영화는 신부역을 맡았던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수녀원장 역에 메릴 스트립 두 주연배우의 연기력을 가지고 이야기가 거론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두 인물의 연기 싸움만이 전부가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두 배우를 넘어서 믿음과 신념에 대한 갈등 그리고 모든 것의 의심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의심스러운가? 신부가 진보적인 성향이라서 그러했는가? 아니면 볼펜을 사용해서 그러했을까?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가치관을 부수려는 행동을 했기에 그랬을까? 아니면 그냥 손톱이 길었던 신부를 의심했을까?
그러나 영화는 모든 것을 의심의 도구로 삼는다. 왜냐하면 신부가 남자아이를 성추행을 했다는 오해로 시작했지만 증거는 정확히 없다. 오히려 신부가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을 의심했기에 그녀는 더욱 집착할 뿐이다. 오로지 오해로부터 시작한 그 문제를 의심하기 위한 의심일 정도다. 하지만 자신이 수녀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어서 신부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마저도 잊은 채 그녀는 의심했다.
신에게서 순종해야 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해도 그는 신을 앞에 두고 의심한다. 그리고 의심은 더 이상 신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며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이러한 수녀원장을 보며 가히 놀랄 것이다. 그런 분위기와 오해로부터 시작한 결과를 관객들은 수녀원장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의심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 그녀는 의심쟁이에 미쳐버린 사람인가라고 관객들은 말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점차 나아갈수록 달라진다. 신부의 믿음이 아니라 그녀의 의심이 핵심이 되어갔기 때문이다. 의심은 신부를 넘어서 주교와 교회로 향했다. 더 넘어서 신이 있다면 절대로 행하여서는 안될 일이 자기 눈앞에 다가왔다는 수녀의 절망을 의심한다. 동시에 이제는 아무것도 믿지 못한 채 신을 섬겨야 할 수녀원장 자신에 대한 의심까지 마주하게 된다.
결국 영화는 무엇을 의심해야 할지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을 의심하게 만들고 끝난다. 신부는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알려주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고백했음에도 의심스럽다. 수녀원장의 과거의 대죄도 의심스럽다. 주교의 행동이 교회의 태연한 모습들이, 흑인 아이의 성적 관념과 그 아이의 가정환경과 미국의 시대상이 의심스럽다. 결국 영화는 신부가 자리에서 물러나기보다는 교구장으로 추대되어 승진한다.
그리고 흑인 아이의 부모는 6월까지만 기다린 대가로 사건을 묵인했다. 그리고 더 좋은 학교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끝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수녀원장이 밝히고자 했던 진실은 다가섰겠지만 끝내 우리가 의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수녀원장은 젊은 수녀에게 고해성사하듯이 대답한다.
"I have a such doubt"
결말에서 남긴 대사는 감독이 지금가지 하고 싶었던 말의 핵심이었다. 오히려 그가 대신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는 것 같다. 많은 의심들 가운데 의심은 삐딱하고 불안정하다. 그렇지만 나는 의심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미 흔들려버린 마음은 더 이상 나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의심한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의심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내가 찬양하는 것조차도 믿을 수도 없게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종교라는 관점에서 신념을 품은 사람들의 시선을 담아낸다. 그렇게 영화는 단순히 대립되는 구조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대립을 넘어서서 의심하지 않는 것과 순종 그리고 의심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화두로 던진다.
점수 : 4.5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