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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Apr 05. 2021

[Black & White]
12인의 성난 사람들

12인의 성난 사람들 (1957)

시드니 루멧의 데뷔작으로 알려진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사회가 생겨난 이유와 역사를 담았다. 특히나 법정에서 한 소년이 재판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중대한 범죄 의혹이었다. 그리고 재판은 끝났으며 배심원은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들은 배심원으로서 귀찮은 의무를 맡았다며 짜증만 낸다. 그러고는 재판에 나온 것이 모두 소년의 유죄로 적용될 수 있다며 유죄를 선고한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다.  


영화는 재판 이후에 배심원의 선택에 따라 생의 운명을 갈리게 된 소년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소년의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배심원단의 모습에 주목한다. 그들은 소년의 유죄를 내려 죽일 수도 있고, 무죄를 내려 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재판 속에 나온 모든 것은 소년의 범죄를 가리켰다. 소년은 슬럼가에 살고 있었다. 언제나 폭력과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곳에서 소년의 범죄는 당연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목격자도 증언도 충분했으며, 소년의 살해 동기와 도구도 확고했다. 모두가 유죄라고 생각했고 이야기는 쉽게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무죄를 주장한 사람의 등장은 영화의 이야기를 변화시킨다. 


유죄라고 판단하기에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많은 배심원단은 그에게 비난을 속출했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1명의 무죄 때문에 배심원단은 모두 토론을 시작했다. 하지만 점차 무죄를 선택한 그의 강단과 논리로 그들은 점차 의심을 품게 된다. 증언도 증거도 정확하지 않다.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모든 정황에 오류가 있었다. 그리고 편견을 모두 걷어내고 그들은 소년을 위해 결정을 내린다.


영화는 민주주의 위대함과 역설을 동시에 담아낸 영화이다. 배심원의 결정에 따라 유죄와 무죄가 갈라진다. 누군가의 선택이 한 사람의 죽음까지도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결정에는 책임이 생긴다. 잘못된 선택이면 억울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혼자만의 결정은 완벽하게 옳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만의 개인적인 판단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첫인상과 말투 혹은 자신의 신념 속에서 결정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의심을 해도 틀린 경우가 많이 있다. 모든 결정이 수학 문제처럼 논리에 의해 해결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없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복잡하고 어려운 난제 밖에 없다. 그렇기에 다수의 사람들이 집단지성을 통해 논의와 토론을 거친다. 그들이 한 명씩 내린 결정이 서로에게 교차되어 오류를 잡아내고 의심을 풀어낸다. 그렇게 얻어낸 해답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수가 의심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기에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위대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의 지점을 생각해보면 단순하다. 다수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수의 사람이 만들어낸 집단지성이 언제나 옳은 판단을 할 수는 없다. 오히려 평범한 시민이자 배심원단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재판에서 나온 결과를 바탕으로 모두가 유죄라고 판결을 선택한다. 논의와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수의 결과물을 반대하는 건 쉽지 않다. 모든 정황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건 오히려 괴롭다. 하지만 한 사람은 반대한다. 그리고 다수는 그 사람에게 비난과 비판을 가한다. 그들이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에서는 그 용기로 인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거나 기억하는 의심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 끝내 개인의 가진 편견을 버리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그렇지만 역전된 상황이 과연 소년의 재판에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인공 데이비스는 특히나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하서 정확하게 모른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의심스럽기 때문에 결과를 단정 짓기 어렵다고 말을 한다.


결국 영화에 내린 결정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정의를 구현한 것인지, 악을 사회에 풀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소년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증언과 목격자의 불확실함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각자만이 품은 편견의 무서움을 각인시켰다. 특히나 인간은 망각하고, 볼 수 있는 시야에 한계가 있다. 스스로 내린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도 존재한다. 다양한 인종과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세상에 살면서 각자가 이해하는 세상은 다르다. 하지만 각자가 이해한 세상을 맞춰나가야만 한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만 옳게 내려질 수 없다. 오히려 불공평한 결과가 나올 때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사회는 그들의 선입견과 편견을 접어두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를 제안한다. 범죄의 재판 결정부터 정책과 정부와 법 등의 사회 전반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에서 품고 지내온 결정 대신 의심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의심에 반대하고 문제를 직면하고 거부할 줄 알아야 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의 주인공 데이비스처럼 말이다. 


이러한 용기를 갖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손을 들어서 아무것도 아닌 내가 나서는 것이 부끄럽고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품고 있는 의심을 내보이면 된다. 설령 영화에서처럼 아무런 증거도 없으며, 재판의 결과가 너무 확신적이더라도 포기하면 안 된다. 의심이 생긴 순간에 편견과 고정관념이 깨지기도 하고, 숨겨진 이면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린 결정이 바뀌지 않더라도 넘어가면 안 된다. 하나씩 결정된 문제들에 의심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표면에 가려져 버릴 것이다. 


영화는 미국이라는 탄생한 역사 중에서 민주주의라는 배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담아낸다. 또한 미국의 근원으로 지금까지 사회에 남게 된 가치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점수 : 4.5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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