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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May 13. 2021

스탈린이 죽었다

by. 아만도 이아누치

스탈린이 죽었다 (2017)

소비에트 유니온 연방 줄여서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연합 국가의 수장이었던 독재자 스탈린의 죽음은 그들에게 크나큰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스탈린을 이어 소련을 통치하게 될 다음 서기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새로운 서기장은 스탈린과 같은 욕망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소련의 미래를 그릴 수 있겠지만 동시에 자신의 운명까지는 예측할 수 없는 블랙코미디 영화였다. 특히나 스탈린의 소련에서 벗어난 각자의 흑심을 품은 소련 내부의 권력자들의 눈치싸움은 어느 영화보다 치밀하고 정치적이다. 


스탈린이 죽었다. 소련이라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었던 레닌 다음으로 권력을 이어받아 강철의 대원수라고 불렸던 서기장의 죽음은 남달랐다. 스탈린이라는 이름 자체에 새겨진 의미처럼 차갑고 강철같이 숙청과 독재권력으로 소련을 통치했던 그였기에 소련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특히나 그와 가장 가까웠던 정치위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탈린에게 충성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사후에도 그들은 숙청을 걱정해야 했다. 여전히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선택하며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결국 소련의 권력싸움이 시작된 순간 더러운 사건들이 터져나간다. 서로를 죽이고, 죽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든다. 그렇게 끝내 얻게 된 권력은 또 한 번의 피바람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소련의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아이러니한 현실을 담아낸다.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는 권력이라는 허상 같은 것이라고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권력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누구나 욕망하고 가지고 싶은 권력으로 무고한 사람마저 살인당하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수 세월을 거쳐 권좌를 위해 싸웠다. 그리고 권좌에 앉은 순간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혹은 불편함에 숙청과 반란에 맞서 세월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숭고하지는 않다. 오히려 권좌를 지키려는 자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럽다. 모두가 코미디언인 것처럼 눈치를 보고, 권력자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광대처럼 그들과 함께 웃고 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을 기록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이것이 소련의 정치이고, 독재의 정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적 모습은 거대한 권력자가 민중과 교감하고 소통한다. 수많은 권위 속에서 표현된 자리 속에는 더러운 흑막이 가득했다. 


이 점은 스탈린이 죽어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이라는 죽은 시체에게 충성하면서도 권력을 찾아 나선다. 때로는 바보 같은 사람을 자신의 방패로 내세운다. 혹은 남들과 동맹을 맺고 암투를 벌인다. 그러다가도 죽은 권력자의 가족을 무자비하게 이용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련을 지배하기 위해 태도를 돌변한다. 모든 것이 사람의 죽음보다도 죽음 뒤에 남겨진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욕망은 참혹한 결과를 내놓고도 책임지게 만들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모두 책임이 없다. 오로지 권력 그 자체를 위해서만 책임 질뿐이다. 슬프고도 어이없는 현실이지만 변할 수 없다. 이것이 모두 현실이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이었기에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결말로 영화를 지켜봐야만 했다. 시민들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은 잠시 배제하더라도, 여전히 가슴속에 남은 씁쓸한 코미디는 잊히지 않는다.  


결국 영화를 모두 보고 난 후에도 소련 같은 현실은 아직 현실에 남겨져 있다. 수많은 독재 국가의 2세대와 3세대 교체기에 일어나는 아이러니는 무자비하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배운 아찔한 블랙코미디를 재밌고, 씁쓸하게 감상했지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보게 되는 뉴스는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어찌 보면 스탈린 사후의 소련의 벌어진 정치싸움은 역사가 아닌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권력 앞에 똑같은 충성 경쟁을 벌인다. 독재자 사후에 벌어지는 내부의 숙청과 암투는 전 3세계 국가에서 흔히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영화와 역사로 끝났다고 믿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는 끝나지 않았다. 내부는 비극과 더러운 암투가 작용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그 자체의 아이러니한 유머를 느낀다. 


그럼에도 전 세계는 여전히 블랙코미디의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비극적 코미디의 시대에서 벗어나 희극적 세상을 향하려는 이들이 있다. 코미디의 시대에서 학습하고 코미디를 던져버리려는 소수의 사람들이 뭉쳐있다. 아직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때문에 코미디는 멈추지 않았지만 세상은 언젠가 벗어날 것이라 믿는다.  


점수 : 4.5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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