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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Jun 03. 2021

로스트 인 더스트

by. 데이빗매킨지

로스트 인 더스트 (2016)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모던 서부극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서부극의 특징은 광활한 사막을 배경으로 범죄자를 쫓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카우보이들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법지대를 가로지르는 자들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카우보이는 방랑과 유목을 스스로 선택해서 떠돌아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비참한 배신과 욕망이 그들을 떠밀게 만든다. 그렇게 영화는 당시의 서부극에서 느꼈던 영화의 쾌감보다 씁쓸한 만가를 보여준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미국의 서부에서 은행강도로 일하는 두 형제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형제이지만 서로의 목표를 위해 동업을 결정했다. 하지만 서로의 다른 성격과 방식 때문에 갈등도 잦고, 불편함도 느낀다. 하지만 형제는 은행에 압류된 어머니의 농장을 지키기 위해서 은행을 털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을 감수하며 돈을 털고 세탁한다. 


연쇄적으로 은행을 털어가며 목표치에 근사할수록 그들을 쫓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점차 쫓아오는 형사들과 형제의 불안한 동거는 여전히 불편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마지막 목표를 해결하고 끝이 난다. 은행의 빚을 모두 갚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발생한 비극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권선징악이라는 말처럼 악한 일을 악으로 행해서 복수했다. 하지만 악한 짓에는 또 다른 복수가 뒤따를 것이다. 결국 반복된 복수는 주인공 태너에게 족쇄처럼 걸려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서부극처럼 영화는 복수 대신 자본으로 끝을 맺었다.


그래서인지 감독은 서부극에서 흔히 폭력과 복수를 통해 악인을 살해하는 정의의 종말을 자주 암시했다. 서부 사회만의 폭력과 정의 구현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법보다도 자본을 위한 세상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서 서부 사회에서 중요시 여겨진 의협심과 의무라는 서사구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서로의 자본에 종속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폭력을 선택하는 사회로 변했다는 사실만 인지시킨다. 우리는 알고 있어도 막을 수 없다. 우리도 그런 족속들과 비슷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본으로 망가진 서부 사회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건 어렵다. 오히려 진정한 악이 정의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바로 자본주의의 핵심인 은행의 외면 말이다. 은행이라는 곳은 자본주의 모든 것이다. 돈이 모이고, 돈으로 투자하고, 돈을 빌려준다. 자본이 흐르는 모든 곳에 은행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은행은 돈의 흐르게 만들고, 사회를 융성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은행은 더 이상 자본이 흐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고여진 물처럼 자본은 있는 자에게 우선적인 선택을 건넸다. 돈이 없거나 빚이 잇는 자들에게 자본은 노예의 삶을 건넬 뿐이었다. 


미국이라는 사회는 이미 링컨에 의해 노예제도가 폐지된 나라였다. 그러나 자본은 그런 링컨의 법조차도 무시할 만큼 강력했다. 그렇기에 영화는 그런 미국이라는 직접적인 사회의 문제를 서부의 가난한 자들의 시선에 집중한다. 은행에 의해 빼앗긴 삶을 은행의 돈을 훔쳐 되찾는다. 미국의 원주민들이 서부 사회의 백인을 약탈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자본은 그들의 약탈에도 불구하고 카우보이들을 밀어내기만 한다. 결국 가난으로 빚쟁이가 되어 다시 빚을 빌리는 대부업체와 은행의 악독함이 전부인 세계는 자손에게 대물림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시카고의 지역 은행에서 강도짓을 하며 돈을 훔치고 빚을 갚는 것이 옳을까? 그러기 위해서 은행 강도로 인해 피해받는 지역의 은행과 사람들에게는 잘못이 없을까? 강도일을 하다가 상해를 입거나 사망하는 자들의 분노는 어디로 흘러갈까? 결국 은행에 대한 복수는 복수일 뿐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여전히 옳은 것이 정확하지 않은 약육강식의 서부 사회 한복판이다. 대신 총과 칼로 위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돈으로써 가치를 표현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내내 은행은 은행강도보다 더 악랄하다. 또한 은행으로 인해 생긴 가난은 질병처럼 내 주위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그래서 나에게 일어나는 부의 기회를 주는 조건만 생기면 악행을 저지르게 만든다. 오히려 악행을 저질러도 자본을 얻는 데 성공하면 악행들이 모두 변호된다. 아무리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의심해도 그들은 자본의 편에서 서서 법을 무시한다. 결국 자본이 숭배되는 세상에 자본은 곧 정의이기 때문이다. 


점수 : 4.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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