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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May 19. 2021

[극장에서 본 오늘의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메시아

유다 그리고 블랙메시아 (2021)

메시아를 배신했던 인물 유다에게 남겨진 것은 은닢 30 세켈이 전부였다. 부족하다만 부족했고, 많으면 많을법한 돈이었다. 하지만 유다는 돈 대신 죽음을 택한다. 예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경 속에 유다는 배신자였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탄생을 우려한 백인들은 유다를 고른다. 그리고 유다는 다시 메시아를 배신했다.   


영화는 68년도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이야기로 담아낸다. 특히나 흑인들은 사회에서 동등한 계층이자 시민권을 받은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차별되었다. 그래서 차별을 끝내고자 일어난 이들은 모두 죽었다. 조지 킹 목사, 말콤 X 모두는 메시아가 되기 전에 죽었다. 하지만 그들이 메시아였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오히려 그토록 두려워했던 블랙 메시아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오로지 흑인사회를 규합하고 미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는 상상 속에 존재였다. 


미국 백인사회의 망상은 그렇게 블랙 메시아로 정의되었다. 그들이 규합되어 자신들을 공격한다면 미국은 무너진다. 하지만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블랙 메시아는 오지 않았고 미국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모든 것이 유다의 배신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메시아로 인해 규합된 흑인들의 세상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다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블랙 메시아의 세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독은 유다의 배신을 객관적인 역사로서 다루고 있다.  


영화는 유다의 배신을 통해 블랙 메시아를 지켜본다. 그리고 배신자로서 유다는 블랙 메시아의 삶의 부분에 살아있다. 그를 추종하고, 협력해서 흑인 사회를 바꾸려는 일원으로서 합류했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행동을 추종하면서 세상이 변화되는 과정을 몸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는 배신했다. 그리고 미국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 인종 그리고 원주민 등의 수많은 인종 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어디서 터질지 모를 인종 간의 갈등은 미국은 나은 사회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프레드 햄프턴에 주목했다고 본다. 인종을 넘어서 투쟁을 결심한 그의 진행과정을 말이다. 특히나 인종끼리의 싸움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사회의 변화를 원했다. 인종이 아니라 계급이라는 사회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미국이라는 사회가 아직도 변하지 않는 점에 주목했다. 아니 변할 수 있던 기회가 사라졌다는 점이 더 옳을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렇게 가난과 부의 격차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격차는 줄어들기보다는 점차 벌어졌다. 부의 평등이라고 부르짖지만 세상은 다르다. 부는 평등하지 않고 가난은 지속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계급처럼 올라가야 하는 삶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들은 변화를 촉구했지만 변변히 실패를 겪었다. 블랙 메시아도 그런 의미에서 맥락이 동일하다. 


흑인이라는 인권과 사회의 억압을 넘어선다. 가난한 백인, 흑인사회의 연대, 히스패닉 각자 다른 생각을 가져도 그들을 뭉쳤다. 시카고에서 말이다. 그들이 서로를 죽일 듯이 싸워도 그들이 뭉친 이유는 하나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말을 알고 있는 나에게 참혹한 심정을 느끼게 했다. 배신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했지만 유다는 결국 프레드 햄프턴의 사회를 믿은 일원이다. 


흑인이라는 인종으로 살면서 부당하게 느꼈던 것을 지켜줄 구원자였다. 하지만 유다는 권력에 굴복했다. 많은 이들은 유다를 비판할 것이다. 정확히는 유다가 되었던 윌리엄 오닐이라는 인물에 비판을 가할 것이다. 흑인을 넘어서 미국 사회에서 가난을 굴복시킨다. 좀 더 나아가 기회를 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을 기대감을 꺾은 것에 대해 울분을 토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닐이라는 인물이 이해는 간다. 누구라도 현실적인 선택과 권력의 무자비함에 포기하기 마련이다. 평범한 인간은 더욱 그럴 것이다. 어느 인간처럼 탐욕에 흔들리고 권력에 두려워했다. 그리고 삶의 밑바닥에서 계층을 벗어나 올라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유다가 되었다. 블랙 메시아를 추종한 만큼 배신의 역할도 철저했다. 배신의 대가만큼 돈을 주고받으며 삶을 충족하게 보탰다. 하지만 유다의 배신처럼 그는 진심으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흑인사회의 모든 것이 아니 흑인을 넘어 가난한 자들이 바뀔지도 모를 미래를 말이다. 하지만 유다의 인생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기에 세상이 변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한번 보게 만들었다. 흑인이 아니라도, 우리는 사회에서 매 순간의 벽을 만나고 막혀서 주저앉게 만든다. 그때마다 누군가의 리더가 등장해서 벽을 넘는 법을 가르쳐줄 때도 있다. 혹은 계급이라는 사회의 사다리 대신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상상과 다르게 세상은 호락하지 않았다. 


배신과 차별로 그들은 사라졌고, 빈자리는 다시 반복된 결과만을 초래했다. 아이러니한 현실에 비참한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다. 세상은 여전히 변화해야 하고 간극을 가진 사람들을 이끌어줄 누군가는 필요하다. 혹은 누군가의 전철을 기억하고 그의 이상을 따라갈 용기를 보여주려고도 했다. 다만 유다의 의 입을 통해 그의 존재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강렬한 울림이 남아있었다. 


세상을 바꾸려 했던 프레드 햄프턴의 행동과 선택이 가슴 깊이 새겨졌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점수 : 3.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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