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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May 26. 2021

[극장에서 본 오늘의 영화] 오케스트라 리허설

by. 페데리코 펠레니

오케스트라 리허설 (1978)

영화 오케스트라 리허설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후기 작품이다. 펠리니의 작품은 지극히 환상적이다. 무엇이 실제인지 구분되지 않는 영화 속에서 우리는 미아가 된다. 그의 역대 작품들은 그렇게 우리를 괴롭혀왔다. 하지만 그의 후기작은 조금 남다르다. 환상이라는 지독한 관계를 배제한다. 그리고 영화는 리얼리즘과 정치적 메시지가 엉켜서 펠리니만의 혼란을 느끼게 만든다.      


이탈리아의 한 유명 오케스트라가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준비한다. 거기다 그들은 방송 인터뷰까지 앞두었는데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 추가 수당이 있냐며 문제를 제기한다. 동시에 여러 악기들이 최고라면서 언성을 높이는 불안정한 분위기를 이끌어 낸다. 오케스트라는 드디어 마에스트로의 등장으로 연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의 독단적인 행동과 억압으로 인해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서로 다른 화음을 연주하면서 연주는 멈춘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화음을 맞추기보다 극단에 항의한다.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 노조를 이용해서 싸우고 폭주하며 점차 폭동으로 이어진다. 오케스트라는 사라지고 폭동이 일어난 마냥 전쟁터로 돌변한다. 그렇게 리허설 장소는 최악의 공간이 된다. 결국 옆 건물을 파괴하는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난다. 사고로 인해 그들은 다시 이성을 되찾고 마에스트로는 혼란을 수습한다. 그는 지휘봉을 들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도 리더의 독단과 욕설은 여전히 지속된 채 영화가 끝난다.      


영화는 제목과 다르게 차분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대신 폭력과 소음으로 점철된 영화이다. 펠리니는 이런 상황에 정치적인 요소를 넣어 영화를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이탈리아의 전후 수습과 여전히 혼란스러운 정치적 문제를 오케스트라에 비유한 것이다. 특히나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집권으로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돌아온 민주주의에는 여전히 통합도 합의도 없다. 서로를 물고 뜯는 과정이 지속될 뿐이다. 서로의 주장과 파벌이 갈리면서 정치적 상황은 안정되지 않는다.      


정치는 서로의 이익을 양분하고 배분하기 위해 경쟁한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언성이 높아지거나 싸움도 일어난다. 하지만 싸움은 양보와 소통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끝맺고자 노력한다. 서로가 만족할 수 없지만 서로의 필요한 이익을 공유한다. 하지만 서로 간의 완벽한 조율로 합의하는 것은 극도로 어렵다. 특히나 리더가 각자의 파트를 조율하고 화음을 이끌어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이상적인 형태이다.  하지만 리더의 통합된 화음이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면 파시즘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리더의 강압이 강해도 불안은 지속된다. 서로의 갈등을 분노와 강압으로만 통제한다. 서로를 위한 존중도 기준도 모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만이 결정하며 문제를 만든다. 동시에 각자만의 주장이 거세지면서 이기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통해 연주를 진행해야만 했다. 완전히 다른 악기들이 서로의 화음을 맞추고 조율하며 연계해야 한다. 모든 것이 다른 악기들이기에 더욱 신경 쓸 것이 많다. 하지만  각자의 음정을 조율하는 과정에는 갈등이 넘친다.


그렇게 갈등을 조율하던 지점이 폭발한다. 강압에 저항하고 상황은 혼란스럽게 변한다. 그렇게 바뀌어버린 오케스트라의 상황은 충격적이다. 그만큼 남긴 상처는 깊고 그때의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그래도 상처와 희생은 분열에서 통합으로 진행하기 위한 단초가 다. 하지만 우리는 분열되지 않고 오로지 통합된 사회를 추구하면 좋지 않을까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올바르지 못하다. 오히려 모두가 만족하는 사회는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나 된 사회는 고립된 사회의 첫걸음이 될 뿐이다.      


결국 오케스트라는 거대한 사회조직 혹은 다양한 분야의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의 집합체의 조율은 곧 정치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축소판이라고 영화를 대답한다. 그들이 각자만의 악기를 다루면서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준다. 하지만 각자만의 개성과 재능은 독처럼 변했고, 폭력과 멈출 수 없는 사건으로 진화된다. 하지만 그들의 큰 사건이 끝나고 서로 다른 화음을 양보한다.


그렇게 조율이 생기고 지휘자의 향방을 정해주며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화에서 오케스트라는 화음을 통일해서 리허설의 첫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오케스트라의 불안정한 음정은 여전하다. 지휘를 통해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찾았지만 지휘자의 독단은 여전했다. 리더의 의지라고 믿으며 다시 강압적인 자세를 보인다. 그들이 겨우 수습한 형태는 여전히  불안정한 조율로 첫 연주만를 선보였을 뿐이다.


어떤 이는 리더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통제된 음악이 오히려 낫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기억해보면 강압된 음악은 완벽할 수 있지만 표현이 색다르지 못하다. 각 파트만의 개성도 없이 음악이라는 이유로 정해진 악보의 세계만을 연주한다. 음악은 표현되기보다 연주될 뿐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인 지점에도 우리는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전한 조율, 자유로운 음악의 경계에서 고민해야 한다. 무엇이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이 될 수 있는 지 말이다.


점수 : 3.5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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