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by. 이창동
인간이 용서를 구하는 과정은 참으로 어렵다. 진심을 다해 용서를 해도 상대편이 거부하면 그만이다. 내가 진심인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혹은 용서의 방식을 교묘하게 속여서 용서한 것 마냥 죄를 감춘다. 용서받는 대상을 교묘하게 속여서 용서한 것처럼 꾸미기도 한다. 자기변명이 절반인 사과문도 용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인간이 자기 사는 동안에 진심을 다해 용서를 구한 적이 얼마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는 용서라는 단어에 민감해한다.
영화 밀양은 바로 민감한 단어 '용서'를 사용한 영화이기에 더 어렵게 느껴진다. 어떤 이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는 용서보다 종교에 대한 영화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밀양이 가진 용서의 의미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알려준다고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구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할 때 피해를 당한 대상보다 그 사건에만 치중한다. 사건으로 피해를 받은 문제에 대해 사과한다. 그렇게 사과라도 하면 된 거지 라는 말로 모든 것을 감추려고 한다. 더 이상 용서해야 할 것이 어디 있냐고 화를 낼 때가 있다.
나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 사건이 원인이 된 것을 수습하려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짜 용서라고 봐야 할지 참으로 어렵다. 특히나 가해자였던 그들은 심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용서를 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종교적인 용서, 사회를 향한 용서, 여러 가지 핑계를 붙인 용서가 곧 그들에게 면죄부처럼 작용된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사건에 용서로 끝이 났다면 덮어버린다. 그 순간 모든 사건은 잊혀버린다. 하지만 내가 상대를 다시 만났을 때 잊혔다고 믿었던 기억은 다시 복원된다. 용서 없는 순간이 평범한 인생에 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힌다. 결국 피해자는 용서해주지 않았는데 그들은 모두 용서했다고 감싸준다. 그래서 용서에는 언제나 용서하는 사람이 중심이 된다. 용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변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그런데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갈 정도로 심각한 사건일수록 용서는 복잡해진다. 이미 죄의 형벌을 받았지만 피해자가 용서를 베푼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가해자가 용서나 죄책감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때면 마음 한편이 편하다. 나는 아직 그를 원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내가 죄를 지은 상대를 용서하면 된다. 그러면 나 자신이 강인한 존재라고 믿을 수 있고, 인생을 굳게 다짐하며 살 수 있다. 그렇게 얻어낸 용서가 피해자에게는 힘들겠지만 내 인생을 재정비하고 악연 같은 사건을 끊어내는 데는 큰 보탬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결정했다면 이야기는 참으로 잔혹해진다.
얼마나 잔혹한 현실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가 죄책감을 깨우쳤으면 좋은 것이 아닐까 이야기도 나온다. 죄를 뉘우치고 반성했으니까 그는 교화가 되었다며 칭찬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범죄자를 용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타인은 그들이 스스로 용서를 구했다는 이유로 그를 사회에서 받아들인다. 물론 죄의 교화는 법의 핵심이다. 교화된 그를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네들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용서를 받았다. 이런 아이러니는 내 가슴속에서 몇 백번이고 깊이 상처가 찔려서 아프게만 느껴진다.
그렇기에 용서라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용서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용서를 베푸는 피해자의 심정이다. 그렇다고 용서를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사건과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용서하며 죄를 뉘우치는 것은 교화의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용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심정과 과정이 생략된다. 용서는 그나마 눈으로 볼 수 있고 말로서 사과하고, 고개를 숙여 행동으로 선보인다. 타인이 볼 수 있는 형태가 있기에 용서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용서를 받는 사람은 언제나 용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알 수 없기에 항상 뒤켠에서 생략되었다. 피해자도 말을 꺼내며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아서 씁쓸하게 파묻혀버린다. 그래서 타인은 용서를 가해자에게만 확인하고 넘어간다.
영화 밀양은 결국 용서라는 주제를 통해 용서를 받는 사람의 입장을 대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 피해자의 배신과 고통이 극단적인 행동에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행동하지 못해도 더한 감정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용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켜보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피해를 입힌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가 더 큰 이슈거리라서 먼저 눈을 돌리게 된다. 그래도 용서를 받는 사람이 겪게 될 인내는 그보다 더 길지만 한 번이라도 돌아봤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들이 하루의 삶을 시작하다가 문득 찾아올 인생의 모든 절망에 관심을 가졌는지 말이다. 사건은 그 사람을 언제나 괴롭힌다. 주변 사람이 지쳐나가고 힘들 때도 많다. 하지만 묵묵히 용서의 과정을 걸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마저도 힘들어서 떠나기를 반복하며 혼자만이 그 사건을 감내한다. 단순하지 않지만 해결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다렸던 과정이 끝나면 특별하게 변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그전에 내 인생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가슴속에는 응어리가 남아도 용서를 못해도 받아들인다. 일단 그 순간을 삼킨 순간 끝나지는 못해도 멈출 수는 있다.
어쩌면 영화 밀양도 받아들인 직후가 아닌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은 이유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주인공 신애를 통해 과정을 겪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시각적으로 담아냈다. 처음에는 의존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살아간다. 단순하지 않은 삶의 역경이다. 하지만 결국 신애의 모든 절망들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머리를 자른다고 미용실에 간다. 비록 그 순간에 벌어진 사건에 다시 원망을 느껴도 누군가를 일상적인 대화도, 집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과정의 전부가 끝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살아간다. 여전히 가슴속에는 남겨진 채로 말이다.
그래서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가슴 아플지 원망하고 싶을지 감정에 몰입했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생겼을 때 영화에서 깊은 의미를 새길 수 있었다. 신애가 남긴 감정보다 신애가 겪게 된 과정과 마지막 순간의 의미가 영화의 깊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새긴 의미가 영화와 맞닿아있을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만큼 너무 깊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씩 얻어가는 것만큼 이해하고 담을 것이다.
점수 : 5.0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