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파스트 by. 케네스 브래너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종교에 대한 분쟁을 알고있다. 어떤 종교의 규합과 분열로 인한 갈등이 생긴다. 그리고 분쟁은 무력으로 이어졌다. 신에 대한 믿음은 같지만 그들은 화합하지 않는다. 신이라는 대상을 믿고 따르며 사랑하라고 애기한다. 하지만 신을 믿는 방식이 다르면 서로를 무시한다. 신의 이름이 다르면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게 신의 이름으로 나타난 갈등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된다.
영화 벨파스트는 종교가 다른 어느 한 작은 동네에서 일어났던 갈등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들은 영국에 속해있지만 아일랜드에서 살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믿는 주민들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여러 세대가 벨파스트라는 작은 동네에서 겹쳐져서 살아간다. 서로다른 경계선을 긋고 살아야 할 것 같은 이들은 평화롭게 살아갔다. 한순간에 벌어진 폭력의 사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일어난 폭력은 사람들을 벨파스트에서 떠나가게 만든다. 그들은 나의 친구가 아니었다. 평범한 이들의 혐오의 세계로 떨어진다. 평범하게 뛰어놀던 주인공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골목길에서 놀던 나의 친구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만들어진 폭력의 이유를 물어도 어른들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도 폭력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인공은 벨파스트라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다.
과연 단순히 골목길을 잃어버린 것으로 끝날 일인가 생각해본다. 처음에는 골목길이겠지만 점차 세상의 경계는 골목길보다 더 커져간다. 경계로 나눠진 것에는 종교만이 전부가 아니다. 사상과 부족이 달라서 생긴 경우도 많다. 휴전선 너머의 같은 민족이라고 말하지만 경계선에 서로를 혐오를 일삼는다. 무엇을 위해 헐뜯고 서로를 비난하며 폭력을 저지르는가 외쳐도 멈춰지지 않는다. 혐오는 혐오로 내뱉어지며 그 자리를 다시 채울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만약 혐오를 피해 떠난다면 어떨까. 아마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떠난다고 혐오가 끝나지 않는다. 골목길의 담장 너머의 세상에 혐오는 새로운 이름으로 머물러 있다. 그 점이 나의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면 표면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타지로 떠났을 때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혐오는 적용된다. 벨파스트라는 동네에서 나와 같은 대상임에도 나와 다른 외지인이라는 이유가 차별을 만든다. 아니면 지역에 대한 비하와 조롱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인다 .
그렇다고 우리가 벨파스트를 지켜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거창한 일을 하기에 우리는 너무 미약하다. 잃어버린 골목길을 돌려주고 싶어도 쉽지 않다. 마치 러시아의 침공으로 탄생된 우크라이나의 모습처럼 말이다. 우리가 그들을 지지해도 벨파스트가 되어버린 우크라이나는 되돌아가기 힘들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고민을 하게 된다.
아마 감독은 그런 고민 끝에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자신의 고향 벨파스트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혐오로 찢어진 과거는 바뀔 수 없다. 하지만 벨파스트라는 공간을 기억하고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남긴다. 그때는 멈출 수 없지만 끝까지 지지하지 않고 그들을 똑같이 대하기를 말이다. 여전히 혐오와 폭력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세상을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어린시절에 나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빼앗긴 골목길을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나는 어린시절의 골목길을 기억 속에 불러와서 다시 영화로 관객들 앞에 대답한다. 나는 혐오를 그리고 차별을 거부한다. 폭력으로 끝나버린 벨파스트와 같은 일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독은 외친다. 더 이상 자신이 잃어버린 벨파스트라는 작은 동네에서 일어난 폭력의 시대를 거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