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lack x Whit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야 Nov 15. 2021

독일이 죽었다.

독일 영년 by. 로베르토 로셀리니 

독일 영년 (1947)


유럽 전역이 2차 대전 직후 몸살이 나있었다. 파괴된 도시와 가난한 사람들이 유럽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전쟁을 시작을 알린 독일은 중심에 속해있었다. 나치라는 인간성을 상실한 이들이 벌여놓은 끔직한 전쟁은 평범한 이들마저 굶주리게 만들었다. 무너진 도시의 석재를 치우고 배급권을 받았다. 학교에 가야할 어린아이는 노동을 하며 삶을 연장시켰다. 하지만 독일은 이미 죽었고, 더 이상의 가망 따위는 없어보였다.

  

영화에서 독일은 강대한 국가이자 나치즘에 속한 나라였다. 국가사회주의라며 독재체제와 유대인의 학살을 통해 독일의 대한 자부심을 키워갔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독일의 패망을 넘어서 독일이 0년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나치만이 독일을 패망하게 만든 원인은 아니었다. 히틀러의 무모한 전술과 전쟁의 피로 그리고 여러 외적인 요인이 전쟁의 결말을 장식했다. 

  

지금의 나치는 몰락한 결과이자 역사의 범죄로 남아있다. 그래서 독일에서 나치는 엄격하게 규제받는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치의 시대를 만들어낸 이유도, 나치의 시대로 만들어진 결과물을 직접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점차 사라져갔다. 영화에서나마 간접적으로 나치의 결과를 남겨냈지만 의미가 와닿기는 쉽지 않다. 과연 나치로 인해 생겨난 끔직한 범죄를 저지르는 소년이 있을까 싶은 외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외면하고 싶은 모습과 다르게 나치는 만들어낸 인간의 모습이 기록과 영상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현대에도 나치는 기록과 영상의 증명처럼 다시 살아남아 있었다. 우리가 보지 않는 곳에서 숨을 죽이고 나치의 시대를 열기를 원했다. 영화는 결국 독일이 망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했다. 나치의 죽음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과거라는 점을 부각하여 나치의 시대는 역사 속에 묻힌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 나치는 살아있으며 언제라도 극단적인 사고와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소년 에드문트에게 나치라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치는 단지 허무맹랑한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전염성이 강한 약물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삶을 도피하게 해주었다. 소년으로서 혼자서 집안을 위해 일을 찾아 나서고, 고통스러운 환경에 자신이 겪어야 할 많은 삶에 피로를 느꼈다. 소년은 나치와 범죄에 빠져들면서 변해간다. 하지만 어느 어른도 소년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회피하는 어른이 되어 에드문트가 만들어낸 결과에 경악했다. 결국 나치라는 사상의 결과는 독일의 멸망이었고, 독일의 미래의 추락이었다. 

  

나치의 시대가 종결되었음을 선언했던 시대에도 말이다. 하지만 현재에도 2차 대전과 나치에 대한 문제는 불쑥 튀어나오고 있다. 과거에 대한 일이기도 하고,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되는 일이다. 90살의 나치 부역자의 재판과 네오 나치라는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주장하는 극우파의 등장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물론 독일의 다수는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다만 언제라도 나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독일 0년은 시작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의 나치가 독일을 점령하지 않을 새로운 문명을 쌓아올리기 위한 초석 말이다. 그렇게 독일은 유럽의 부유한 재정과 강력한 힘으로 도약했다. 그만큼 0년 이후에 독일은 나치를 경계했다. 하지만 나치의 시대가 돌아올지 모른다. 소년 에드문트의 안타까운 결말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기억을 시작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0년이었던 그 시절의 독일을 말이다.  


점수 : 4.0 / 5.0


매거진의 이전글 농담으로 씌여진 가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