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장래희망 그리기를 했다. 4~5학년 때 우리 반에서는 한창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유행했고, 특히 나와 친한 여학생들이 모두 다 너도나도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 떠들어 댔기 때문에 나도 그것이 꿈이라고 믿었다. 그때 내게 장래희망이란, 딱 그 정도의 무게였던 것이다.
난 그림도 제법 즐겨 그리는 편이라서, 빵모자를 쓰고 있는 -왠지 그 당시의 나는 예술가라면 빵모자를 꼭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모습을 그린 후, 밑에다가 또박또박 썼다.
뭐시기 디자이너
뭐시기라고 쓴 것은, 분명 그냥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 앞에 무언가 한 단어가 붙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6학년이 되었고, ‘디자이너’는 내 친구들 사이에서 더 이상 유행이 아니었다. 나는 진로희망을 써야 하는 종이 앞에서또다시 생각했다.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때 나는 예중을 가겠다고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었는데, 당연히 피아니스트라고 쓰면 되었을 걸 뭘 그리 고민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만능 엔터테이너
이 단어에 꽂힌 이유는 내 기억에 - 개콘 초기, 누구나 밤바야 심현섭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웃긴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믿을 때 - 그가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와 함께 방송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만능 엔터테이너. 그 단어는 너무나 멋져 보였다. 사실 그 단어의 정확한 뜻 따위는 잘 몰랐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엔터테이너’ 앞에 있는 ‘만능’이라는 수식어였다. 만능. 만 가지에 능하다. 그러니까,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사람이라니. 와. 난 이게 되어야겠다. 뭐든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던 그 어린이는 커서, 교사가 된다.
교사가 되기 전엔, 그저 자기 과목을 잘하고, 그걸 잘 가르치면 되는 줄 알았다. 나는 사범대가 아니라서 교직이수 과정을 밟았는데, 대학 때 교직이수 과목을 수강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교직 4년 차의 내가 감히 말하건대, 실제의 학교는 대학에서 배운 것 그 이상의 능력들을 자꾸만 내게 요구했다.
또 학교란 얼마나 변화무쌍한 공간인지, 매년 아이들과 동료 교사가 달라지고, 매년 업무가 바뀔 수 있고, 5년마다 한 번씩은 아예 다른 환경의 학교로 가야 하고, 심지어 그 해에 맡은 반 아이들과도 매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가끔 교과 수업, 학생 지도 및 상담, 학급 경영, 각종 업무, 때로는 수련회, 소규모 테마여행, 체육대회, 학급 행사, 학교 축제까지 교사로서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며 학교 생활을 하다 보면, 이전에 잠시 꿈꿨던 ‘만능엔터테이너’가 떠오른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일부 그 꿈을 이뤄가며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까지 발견하고 혼자 웃었다.
유영식, <교육과정 문해력>(2018)
배움 디자이너라는 표현이 있다니. 나는 결국 뭐시기 디자이너라는 꿈도 이뤘다고 칠 수 있을까?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는 소설 표지엔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살다 보니 내 인생엔 만능 엔터테이너와 디자이너와 교사라는 점이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쓰면서 과거와 현재의 점을 잇는 의미의 징검다리를 하나 놓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