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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Sep 15. 2020

가르치려고 하지 말자는 다짐

교사입니다만


 가르치려고 하지 말자.


작년 말, 나는 이런 다짐을 하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교사가 ‘가르치려고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다니, 그래도 될까?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교사(敎師)라니, 불량 교사 아닌가? 업무 태만? 뭐 이런 교사가 다 있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학생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때의 내가 그런 다짐을 한 것은, 학생의 ‘배움’은 생각하지 못하고 너무 많이 ‘가르침’에만 열정을 쏟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나도, 학생도, 너무나 괴롭기만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가르치려고 하지 말자’는 것은 그런 나를 위한 ‘맞춤형’ 다짐이다.




정말이지 나는  가르치고 싶었다. 교과뿐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 있어서. 그런데 언젠가, 선생님으로서 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는 다 해주었다고 믿었지만, 결국 나의 마음대로 변화하거나 움직이지는 않았던 한 아이를 만났다. 교사는 학생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잘 가는 것 같다가도 불쑥불쑥 안 좋은 모습을 보이는 아이를 대면하는 것은 마치 넘어가지 못할 벽을 마주한 것과 같은 절망감과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나, 올바른 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나는 무능한 교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나를 괴롭게 했다.


다른 선생님이라면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었다, 믿음을 보여줘도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봐도 강하게 꾸짖어 봐도 칭찬을 해보거나 가만히 둬 봐도 약속을 하고 또다시 어기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해도 무슨 말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 교사의 말 한마디가 학생의 자아 개념을 만들 수 있다는데, 혹시 나의 부족함으로 학생의 자아 개념이 부정적으로 바뀌면 어쩌지, 내가 뭘 잘못했나, 그때 이렇게 할 걸 그랬나, 그냥 그 아이가 나를 만난 것 자체가 불행이 아닐까, 내가 더 강하게 혼냈어야 했던 걸까, 충분히 엄하지 못했던 건가, 아니면 아예 관심을 안 보이는 것이 나았던 걸까, 하는 복잡한 생각들.


하지만 제 자식도 제 마음대로 못하는 세상에, 내가 모든 학생들을 다 마음대로 바꿀 수 있길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었다. 전지전능하다는 신조차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제 마음대로 바꿀 수 없게 했는데 말이다.




나는 분명 그 학생에게서도 가능성과 좋음을 보았었다. 다만, 아마 때가 아니었나 보다. 학생이 배울 준비가 되어 있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가르침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책(토머스 고든, <교사 역할 훈련>)을 읽었다. 좋은 말들, 설교, 설득, 압력, 처벌, 그 외에 교사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에겐 곧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가르침’에만 집착한다면 학습자의 내면에 저항을 불러일으키며, 교사 스스로도 상처 입고 지칠 확률이 크구나. 내가 그랬다.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배움과 가르침은 일어날 수 없었나 보다.


가르침 이전에 학생이 배울 수 있는 상태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 배울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배움에 있어 어떤 부분은 학생의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것. 학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정만 컸던 나는, 그것을 큰 값을 치르고 배웠다.


또한 변화는 그리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했던 말들이 일 년 뒤에 혹은 십 년 뒤에 그 아이에게 와 닿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교육의 성과는 단기간에 나올 수 없다. 나에게는 1년이라는 시간만 주어졌을 뿐이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 교사가 말했다.
-저희에게 ‘가르침’에 대해 말씀해 주소서.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어느 누구도 이미 그대들 깨달음의 여명 속에 선잠이 든 채 깃들여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 제자들에 둘러싸여 사원의 그늘을 거닐고 있는 스승은 신념과 사랑을 나눠 줄 수는 있지만 지혜를 주지는 못한다. 그가 진정한 현자라면, 그는 그대들을 자기 지혜의 집으로 들어오게 인도하지 않고 그대들 자신의 마음의 문으로 이끌 것이다.
 천문학자는 우주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그대들에게 말해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자신의 깨달음 자체를 고스란히 전달해 주지는 못한다. 음악가는 그대들에게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선율을 들려줄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선율에 주의를 기울이는 귀나 그것을 울려 내는 목소리 자체를 주지는 못한다. 수학자는 무게와 길이의 세계에 대해 그대들에게 말해 줄 수는 있지만, 당신을 그리로 데려다 주지는 못한다.
 인간의 통찰력이란 타인으로부터 그 날개를 빌려 쓸 수는 없는 탓이다.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에서      


그래도 그렇게 흔들리며 또 일 년이 지났기에, 이제는 조금 더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종교는 없지만, 예수님조차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지 않았던가. 어떤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열매 맺히는 것이 다르며,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다.


어떨 때는 비록 눈 앞에서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도, 언젠가 어떤 상황과 조건이 갖춰지는 때가 오면 싹이 틀 씨앗을 하나 심었다고 믿는 것, 혹은 열심히 학생의 땅을 갈고닦아 비옥하게 만들었다고 믿는 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뭐, 예수님의 가르침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 통한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모든 학생들을 다 가르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 그러니까, 가르치려고 하지 말자.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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