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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an 10. 2021

인문학도가 주식에 눈을 떴는데요

부자 되게 해주세요


너도나도 주식 열풍이다.


막연하게 ‘주식이나 펀드는 위험하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나는, 성실하게 예적금으로 돈을 모았다. 투자를 하면 어쨌든 모은 돈을 잃을 수도 있다는 그 ‘위험성’이 싫었다. 열심히 번 돈을 조금이라도 그렇게 잃으면 너무 아깝잖아.


그동안 예적금 외에 돈을 모은 방법은, 돌이켜보건대 아마도 ‘안 쓰기’였던 것 같다. 나의 성향 중 하나가 물질적인 것에 덤덤한 편이라는 것이다. 가방이든 신발이든 옷이든 어떤 물건을 사면 그냥 떨어질 때까지 쓴다. 술이나 담배를 하지도 않고, ‘쇼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머리가 아프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뭔가 나의 즐거움을 위해 소비하는 법을 잘 몰랐다.


게다가 집순이 인문학도에게 세상엔 물질적인 것 이외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비싼 물건을 소유해야 행복한 건가? 성공에 대해서 왜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만든 척도를 따라가야 하나.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다- 다 자기 팔자가 최고인 거다- 라는 태도로 그냥 예쁜 하늘 한 번 보면 행복하고, 길을 걷다 숨 한번 쉬면 행복하고, 좋은 책 한 권 읽으면 행복하고,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행복하고, 맛있는 거 먹으면 행복하고, 그런 행복에 익숙했다.


그렇게 돈 몇 푼 쓰는 것에는 달달 떨고, 살아가는 데에 별 불편함을 못 느끼면서, 월급의 절반 이상을 다 적금으로 넣었다. 그러면서 나는 돈을 잘 모으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아니, 그러던 나도, 최근에 아주 소액으로 주식을 시작했다. 몇 푼짜리든 주식을 조금 갖고 있으니, 시간이 남을 때 SNS가 아니라 인터넷 뉴스 헤드라인 기사들을 훑어보게 되고, TV를 돌리다가 예능이 아닌 뉴스에 잠시 멈추게 되는 등,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생긴다. 특히 경제 뉴스를 읽게 되고, 정부의 정책들과 향후 방향이 더 궁금해진다.


시작한 계기는 별 거 없었다. 먼 곳에서 ‘다들 주식한다고 하더라’라고 떠도는 말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내 친한 친구가 주식을 하고 옆자리 선생님이 주식을 하니 그제야 나도 관심이 생겼다. 곧이어, 누구는 주식으로 몇천을 벌었고, 누구는 주식으로 돈을 벌어서 하나씩 집에 있는 가전제품을 바꾼다는 말을 들으며, 음, 나는 그동안 뭐했지, 주식을 해볼까,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는 조급한 마음이 점점 생겼다.


좋아하는 소설 중에 하나인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과연, 맞는 말이었다.




그런 조바심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왜 더 빠르게 주식을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일단 새로운 것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귀찮았다.

-주식의 ㅈ도 몰라요... ㅈ도 모른다고.


그렇다고 주식이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이익을 많이 보는 판이냐,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학교 공부는, 공부한 만큼 그래도 어떤 점수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럼 노력한 만큼 어떤 보상이 따라온다. 이런 판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주식이란 너무나 불공평하고 예측 불가능한 판이었다.


게다가 주식은 있는 놈이 더 버는 판이다. 넉넉한 여유 자금을 가지고 주식을 하는 사람과, 정말 열심히 모은 소중한 자본금으로 주식을 하는 사람이 같은 필드에서 게임을 한다. 자신이 투자한 종목이 상승세일 때 두 사람이 꿀꺽하는 돈의 양과, 하락세일 때 두 사람이 느끼는 공포감은 결코 같지 않으리라. 한쪽은 현질로 풀강화한 무기와 방어구를 들고뛰는데, 누구는 기초 장비랑 나무 몽둥이 들고뛰어야 한다. 퉷 더럽다, 주식! 더럽다, 자본주의!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 내가 이 판을 뒤집기는 힘들다. 자본주의 더럽다고 침을 뱉고 멀리해 봤자 바뀌는 것은 없으며 나 혼자 어디 무인도에서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지 않는 이상은 벗어날 수도 없다.


뭐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위대함을 깨달았으니, 자본주의교로 내 믿음을 개종(?)하여 무엇보다 돈이 최고라는 신앙을 가지면서 의미 없는 경쟁과 소비에 익숙해지기로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적어도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고, 현명하게 내 삶의 자유를 찾으려는 발버둥을 한번 쳐 보고 싶다.




예능을 보고 SNS를 뒤적이면 잠깐은 기분 전환이 된다. 그 힘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게 만약 그 세상 ‘밖에’ 없다면? 얼마나 좁은 시야로, 좁은 세상에 갇혀 있는 것인가. 누군가 내 등에 꽂은 빨대를 못 보고서 살아간다면, 화를 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면.


현실적으로, 지금 사회에서 노동자란 어쨌든 자본가에게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순진했던 이십 대의 나는 그걸 모르고 열심히 노동자 워너비의 길을 걸었다. 아니, 알면서도 다른 길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에 가깝지만. 이 거췬 쉐상 속에서, 나는 내다 팔 것이 나의 노동력밖에 없다. 지금도 나는 반전세를 살면서 내 노동의 일부를 달마다 꼬박꼬박 집주인에게 바치고 있다. 내가 왜 집주인을 위해서 일부 노동하고 있나! 억울하지 않나? 약 오르지 않나!


나는 공무원이라 사업도 못 하니, 그럴 바에는 일단 소액이라도 ‘투자자’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노는 동안에도 이 회사가 나를 위해(는 물론 아니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이윤을 추구하며 성장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약간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꾸준히 공부하면서,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현명한 투자자가 되고 싶다. 조금 더 일찍 관심을 가질 걸, 하는 후회를 잠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을 그냥 보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나의 시간을 다른 곳에 잘 썼고, 대신 얻은 것들도 많으니까,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시간, 후회하고만 있는 것은 내 손해다.


주식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은 없다. (이 글의 부제는 무시해주세요.) 지금 놀고 있는 돈을 좀 끌어모아서 해보는 것이지, 당분간 낮은 금리를 욕하면서도 예적금의 비중은 꾸준히 유지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하는데, 돈에 있어서는 안정을 추구하는 내 성향이 크게 바뀌지 않을 테니까.


다만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인문학도 주생아(주식 신생아...)는 응앙응앙 울며, 열심히 일 더하기 일은 귀요미라는 것을 배우겠다.


마지막으로 매우 뜬금없고, 아마 관련도 없을 테지만, 갑자기 백석의 시가 생각나서 여기 적어 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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