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방인 Jan 29. 2023

의역? 직역? 뭣이 중헌디?

의역과 직역 사이 


번역을 하다 보면 직역과 의역의 경계에서 길을 잃을 때가 더러 있다.


원문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의미를 어색하지 않도록 우리말로 바꾸는데 원문에 중점을 더 두어야 할지 우리말에 중점을 더 두어야 할지 모호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만의 어떠한 원칙을 갖추고 있는 고수분들 중에는 이러한 갈등에서 절묘하게 중심을 유지하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경험이 일천한 나 같은 경우에는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쏠릴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감이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저렇게 하는 게 더 낫겠다' 하는 것도 아직은 개인에 판단에 좌우되기 때문에 아직은 무언가 이렇다 할 만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다만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직역을 해도 의미 전달에 문제가 없으면 직역을, 우리 정서에 맞지 않거나 의미가 어색하게 느껴지면 의역을 선호하는 편이다.







의역과 직역의 문제는 번역가뿐만 아니라 편집자, 그리고 독자에 걸쳐 의견이 분분한 문제이다.


어떠한 이들은 의역을, 어떠한 이들은 직역을 더 높게 쳐주는데 멋도 모르지만 내가 봤을 땐 양측 의견 모두 맞는 말처럼 보인다.


글쓴이가 선택한 단어와 그 숨은 의도까지 해석해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하면 직역에 충실해질 것이고,


번역가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이를 독자가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면 의역에 가까워질 것이다.


때문에 원문에 무게감이 더 높은 경우(경전, 고전 등)에 주로 직역을, 그렇지 않은 경우 의역(논픽션, 픽션, 현대 소설 등)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내 이러한 해석이 모든 경우에 전부 들어맞지는 않지만 대략 이렇게 해석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사실 나로서는 이러한 담론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논의가 필요하다는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것이 마치 숲을 보는 게 아닌 나무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업계 종사자가 아니라면 독자들이 원하는 건 책을 읽고 작가의 생각과 경험을 배우고 느끼기 위함이지 직역인지 의역인지 따위는 독자의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디테일을 무시한 채로 마구잡이로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직역이 되었든 의역이 되었든 오역이 아니라면 문체는 번역가 고유의 영역으로 남겨놔도 괜찮지 않겠냐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직역과 의역은 마치 정치 성향처럼 자신이 지닌 성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치처럼 첨예하게 대립하진 않지만 분명 자신이 어느 한쪽을 굳게 믿고 선호하고 있다면 이는 아마도 같은 무의식적 뿌리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임이 분명하다.


아마 자신의 성격과 가치관이 원칙과 전통적 규범을 중시한다면 직역을, 자유롭고 도전적인 성격이라면 의역을 선호할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공통점은 둘 모두 필요한 가치이지만,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모든 가치문제에 있어 적절한 중간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잠시 균형을 잃고 치우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중간을 찾아 되돌아온다.


비록 너와 나의 중간이 다를지는 모르겠으나 둘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다면, 서로의 차이를 두고 왈가왈부하기보다는 본질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번역이 삶과 같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