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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Feb 22. 2023

전쟁터 Vs. 지옥

회사 같은 전쟁터 Vs. 현실 같은 지옥


오늘 지인들과 이런저런 근황을 이야기하던 도중, 그들이 다니는 회사를 둘러싼 환경이 크게 바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바뀌는 환경은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썩 좋지 않은 방향이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저성장 시대에 걸맞게, 회사도 감축을 시도하려는 것인지 여러모로 많은 회사들에서 매출이 좋지 않은 사업부터 정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듯하다. 사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빨리 변화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러한 주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처음으로 회사 생활에 의구심을 품었던 때가 생각이 난다.

당시 나는 한창 원기왕성하게 일을 하던 시기였는데, 일 년에도 해외 출장을 밥 먹듯 다니다 보니 외국에 체류한 기간이 한국에 머문 시간보다도 많은 해도 있을 정도였다. 

다른 회사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출장을 나가면 기본 12시간 이상씩 일하고, 토요일 반납은 기본에 법정 공휴일을 챙기는 것 역시 언감생심이었다. 그때는 업무 능력을 키우기에도 바쁜 시기여서 불평을 할 여유도 없었거니와 그렇게 일을 하고 성과를 내면 분명 미래에도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러한 희망이 있었기에 그런 고된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속한 부서가 맡은 사업이 매각된다는 찌라시가 내부에서 돌기 시작했다. 

세부 내용이 꽤나 구체적이었는지 웬만한 찌라시에는 눈 깜짝도 안 하던 차장, 부장급 선배들도 초조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하나의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방향이 옳았고, 또 그게 맞다고 배웠으며 나 역시 그렇다고 믿었기에 그 충격은 더 했다. 나의 미래의 모습이자 엘리트 인력이라 생각했던 선배들이 크게 동요하고 무기력에 빠진 모습도 당시 나에게는 충격이었고,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 밤낮없이 일에 몰두하며 더 나은 결과를 내기 위해 동료들과 아등바등하던 그러한 시간이 내가 어찌할 수 없고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결정에 의해 의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이러한 삶의 방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내 안에 경각심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오랜 방황이 시작되었다.



회사는 분명 안정을 주지만, 이 안정이 때로는 사람의 현실 감각을 둔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스스로 선택해 이루어 왔다고 믿던 나의 인생이 누군가의 결정으로 인해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나의 안정은 깨졌고 잠자고 있던 현실 감각은 다시 깨어났다. 결국 사업 매각은 없었던 일이 되어 모두가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한 번 날뛰기 시작한 나의 내면의 불안은 어떤 식으로도 잠잠해지지 않았다. 


더 이상은 누군가에 의해 무력하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능력은 부족해도, 벌이는 시원치 않아도 스스로의 힘으로 꾸역꾸역 살아가고 싶었다.


드라마 '미생'의 한 대사가 생각났다. 

먼저 퇴사한 선배를 만난 오 차장에게 선배는 이런 말을 남겼다. 

회사는 전쟁터이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야

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공감하며, '더럽고 치사해도 회사에 붙어있는 게 최고'라며 말을 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 말에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낀 [전쟁터]에서의 생존 방식은 [지옥]에서의 생존 방식과 서로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출중한 능력으로 빠르게 진급하고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중역의 위치에 오른 존경받는 분들은 분명 전쟁 영웅이었지만, 사회라는 현실에서 그런 베테랑을 환영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보다는 체력 좋고 값싼 이등병을 선호하는 현실에서 전쟁터를 벗어난 영웅이 순식간에 아무런 존재도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실제로 회사에서 정년 가까이 근무하다 퇴직한 선배들이 어딘가에 다시 취직했다는 소식은 없었던 것 같다. 

한 가지 오해는 말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말이 그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만 사회적 기능에서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던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전쟁터를 떠나 지옥으로 가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사실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지인들 역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이 느낀 위기감과 내가 느낀 위기감의 심각성이 서로 다를 뿐인 거다. 절대로 내 생각이 맞고 그들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 안의 경고등이 계속해서 시끄럽게 울려댔기 때문에 그들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가.


Chat GPT, DEEPL, Novel AI 등 AI의 발전이 심상치 않다. 

인간의 지적 노동 영역은 계속해서 빠르게 대체되어 가고 있다.

다시 말해 전쟁터에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의 무대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설사 사람이 필요한 무대가 새로 생긴다 하더라도, 거기에 나의 자리가 남아 있으리라 장담할 순 없을 듯하다.

나 같이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생존방식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게 언제든 예리한 현실감각을 갈고닦아 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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