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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Feb 25. 2023

화성에서 온 여자, 안드로메다에서 온 남자

삶의 가치관 차이에 대한 고찰

우리 부부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서로 너무도 다르다.

우리 둘 다 적당히 무난하면서도 적당히 게으르고, 또 적당히 욕심도 부리며, 적당히 이기적이다. 재테크나 미래에 대한 목표도 꽤 합이 맞아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인지라 평소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끼는 반면, 서로 다른 점에 대해서는 또 극명하게 갈리는 특성을 보인다.


나는 종교에 두루 관심이 많지만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아내는 종교가 있지만 관심이 없다.

나는 현실에서 반쯤 유리된 이상주의자지만, 아내는 철저히 현실 지향 주의자이다.

나는 평소 차분한 편이지만 종종 욱하고, 아내는 평소 화가 많지만 난데없이 욱하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부부가 만나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으니 하루가 머다 하고 옥신각신하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허다하다.

런 아내와 내가 싸우면 누가 이길것 같은가?

마치 호랑이와 사자의 싸움같이 막상막하의 비등함을 이루었으면 좋겠지만, 가정 내에서의 암묵적인 서열과, 재산 형성의 기여도, 경제력, 성격 등 전반적인 면에서 아내가 나보다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에 대부분의 싸움은 성사도 전에 내가 꼬리를 내리는 형태로 막을 내리곤 한다.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양보하지 않고 치열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육아와 나의 일에 관한 문제였다. 육아 이야기도 다음에 해 볼 수 있을 듯 하지만, 비록 형식적이 나만 번역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일상의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이번에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구 직장인, 현 프리랜서 번역가

개인주의적이며, 상호 간의 대등한 계약 관계와 신뢰 및 과정을 중시함, 선을 지키는 한도에서 개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나, 깊이가 얕고 무언가를 계획하고 정리하는 일에 약함.
아내

현 고소득 직장인

집단주의적이며 공동체 중심의 목표와 결과를 우선시 함,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서 관계를 중시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책무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전통적 삶의 태도를 지향함.

확실하지 않은 길은 가지 않는 주의, 보수적인 투자로 가계 살림을 윤택하게 함



나는 여건만 된다면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살고 싶다.

마음 내키는 대로 뉴욕에서 몇 년, 파리에서 몇 개월, 그리고 어느 이름 없는 북유럽 작은 소도시의 3성급 호텔에 하루종일 처박혀 책을 파고 글과 사색에 빠지는 시간을 갖고 싶지만, 현실은 그저 근근이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의 가장에 불과하다.


아내에게 이런 희망 사항을 넌지시 이야기할 때면 대개 이러한 반응이 되돌아온다.

'돈은? 애 학교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생각이 하늘 위로 둥둥 뜨려 할 때면, 여지 없이 날아오는 아내의 쓴 소리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아내의 희망 사항은 현실주의자답게 강남 입성(이번 생에는 불가능할 듯한...)이다. 좋은 차, 좋은 집, 모두가 선망하는 강남 8학군 등, 그나마 우리 집 살림이 어찌어찌 굴러가는 건 그런 아내의 손을 거쳤기 때문이다.





나의 프리랜서 번역가라는 커리어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불안정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인생을 주도한다는 만족감을 제외하면 모든 현실적인 조건에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에 비해 열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에 익숙한 내가 이것을 끝내 양보하지 못하는 건 이것이 나의 삶의 태도, 더 나아가 내 생각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자신의 한계에 대해 이해했다.

나는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면 서서히 시들고 마는 형태의 인간이라는 것을.

번역, 글쓰기, 독서, 그리고 사색은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기발한 새로움과 조우할 때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즐거워한다.





나는 어째서 우리 둘 사이에 이렇게 극명한 성향 차이가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적이 있다.

조금 깊고 철학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언젠가 있을 죽음에 대한 생각과 이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나오는 다름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급하면 불편하고 마주하기 껄끄럽고, 가까운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두려워해 굳이 그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 부분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한 가지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나는 죽음의 존재를 외면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그것을 아내보다 더 분명하게 인지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나는 명백히 결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인생을 어떠한 가치로 채울지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관심을 두는 것뿐이다.


어쩌면 내가 어리석고 아내가 현명할 수도 있다.

누구 말마따나 아내 잘 둔 덕에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헛생각이나 하고, 직장 나와서 번역 같이 돈 안 되는 일도 할 수 있는 거라는 말을 들어도 머라 변명할 말이 없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생각건대 원했건 원치 않았건 간에 이렇게 태어났다면, 존재나 인생의 가치와 같은 더 근원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인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없으면 또 어떤가? 내가 한 번 만들어서 채워보는 것도 좋을 듯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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