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방인 Mar 05. 2023

제치거나, 제쳐지거나

AI 시대를 맞이하는 사회에 대한 개인적 소회

확실히 전에 비해 번역에도 AI의 영향력이 곳곳에 느껴진다.

최근에 이와 관련해 조금 힘이 빠지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최근에 맡은 일 때문이다.




모 에이전시로부터 프루프리딩(ProofReading)이라고 해서 일반 번역과는 달리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을 검수하는 일을 맡았는데, 업계 관례상 프루프리딩은 일반 번역에 비해 요율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검수할 작업물의 번역 퀄리티가 좋다면 검수할 부분이 줄어드니 빠르게 일을 할 수 있어 요율이 낮더라도 충분히 감내할만하겠지만, 만일 퀄리티가 좋지 않다면 정도에 따라 재번역을 제시하던가, 아니면 지속적인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그 부담을 오롯이 검수자가 떠안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나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기에 일을 맡을 때 어느 정도의 추가적인 수고는 감내할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에 맡은 일은 번역 퀄리티 운운할 것도 없이 그냥 기계 번역 결과 그 자체였던 것이었다...

사전 인터뷰 때부터 앞으로는 인공지능 번역이 어쩌고 할 때 느낌이 약간 싸하긴 했는데, 뭔가 속은 듯한 느낌이 들어 한동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연하겠지만 번역은 전체를 죄다 뜯어고쳐야 하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번역일 중에는 MTPE(Machine Translation Post-Editing)라 해서 기계번역을 검수하는 영역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사전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게 예의이다. 번역가 입장에서는 MTPE 작업이 요율은 낮은데 작업량은 일반 번역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아 기피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 역시 MTPE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일을 맡기는 회사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는 가지만... 이해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이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기만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가 역시 마음만 먹으면 MT(기계번역) 기능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해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말이 좋아 MTPE 지 그냥 낮은 요율로 싸게 번역을 맡기겠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토로의 글을 보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을 할지도 모른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누가 칼 들고 하라고 협박함? 다 자기 선택임'


그들의 논리는 틀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속상하다 느끼는 건, 인간으로서의 소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번역 기술의 발전은 결국 번역가의 업무를 덜어 줄 것이다. 

아마 머지않아 약간의 검수와 수정 작업 만으로 인간이 번역한 수준을 상회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날도 곧 오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공지능에 의해 우리가 하던 일이 대체될 현실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러한 미래의 위협에 당장 노출되지 않은 누군가의 이익에 등 떠밀려 어쩔 수 없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이는 분명 누구에게나 속이 상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적절한 비유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났다. 

그 장면은 공중 다리에서 한 중년 남성이 기지를 발휘해 뒤따르는 일행이 모두 무사할 수 있었으나 결국 끝에 가서 상우(극 중 박해수 역)에 의해 떠밀려 아래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스포가 있으니 원치 않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누르세요.)



상우 : 운 좋게 제일 뒷자리를 뽑더니... 마음이 아주 너그러워지셨네?

상우 : 그러다 그 인간이 그 깡~패새끼처럼 못 가겠다고 버텼으면..... 그땐 어쩔 건데?

기훈 : 너나 나나 다 그 사람덕에 다리 끝까지 살아서 간 거야...

상우 : 씨바 형.. 형은 모르겠지만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 그놈 덕이 아니야... 내가 살아있는 건..? 
        내가 살아남을라고 죽을힘을 다했기 때문이야.

상우 : 형 손에 피 안 묻히게 해 줬으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되는 거 아니야?

기훈 : 그게 나였어도 밀었을 거냐?

상우 :..... 하.... 씨발!!... 아.. 기훈이 형!!!.... 형 인생이 왜 그 모양 그 꼴인 줄 알아? 
지금 이 상황에도 그런 한심한 질문이나 하고 자빠졌으니까!  오지랖은 쓸데없이 넓은 게 머리는 존나 나빠서 씹ㅂ...똥 인지 된~장인지 꼭 처먹어봐야만 아는 인간이니까!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中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고, 남은 시간조차 많지 않던 상황에서 상우의 행동은 분명 논리적이고 전체의 이득을 고려한 효율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합리적인 비인간적 행동을 한 상우보다 인간적인 비합리적 행동을 한 기훈의 의견에 더 마음이 간다. 왜냐하면 상우에게는 인간으로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기훈과 우리가 상우에게 느낀 분노는 분명 인간 소외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싶다.


도래할 AI 시대에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이러한 소외이다.

아무것도 의미도 아닌 존재로 취급될지도 모른다는 뿌리 깊은 두려움. 

그것이 우리의 두려움의 근본 이유이다. 

비록 다가오는 해일을 막을 방법은 없을지라도, 모두에게 닥친 위기 속에서 잠시라도 내가 먼저 살아보겠다며 타인을 먼저 밀어내는 사회보다는, 순진한 생각에 불과할지라도 서로의 어려움을 공감하며 협력해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사회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언어의 한계, 인식의 경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