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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Mar 09. 2023

영원한 미완의 숙명

끝없는 자기 불만족에 대한 고찰

글과 번역, 둘 다 글을 쓴다는 행위를 뺀 또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시간이 지나 다시 결과물을 보면 그렇게 미흡해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부족한 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보니 '내가 이렇게 허술하게 글을 썼다고?'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불과 얼마 전에도 그랬다.

한창 번역 작업 진행할 때의 일이었는데, 미리 작업해 놓은 번역물을 퇴고할 일이 있어 이런저런 파일을 컴퓨터 창에 띄어 놓은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작업을 하다 우연히 파일 제목을 봤더니, '아차!'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참고하려고 열어 놓았던 이미 기 완료된 파일을 퇴고하고 있던 게 아닌가!!!

당연히 그 글은 지난번 이미 마무리지어 고객에게까지 넘어간 것이었다. 정신을 놓고 일하다 벌어진 어이없는 실수였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제목을 보기 전까진 내가 이상하다는 점도 알아차리지도 못한 데다 실제로 꽤 많은 구절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헛물켠 상황에도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흠결 많은 결과물을 고객에게 납품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시 납기라는 상황적 제약과, 내가 가진 체력 집중력 등 제한된 자원을 고려했을 때 당시  내가  수 최선이었던 건 맞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살펴보니 참으로 엉성한 부분이 많 눈에 띄어 창피한 마음이 드는  어쩔 수 없었다.





과거의 내가 볼 수 없던 것을 지금의 나는 볼 수 있다니...

좋게 해석하자면 그만큼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물을 내는 당사자로서 매번 내놓는 결과물에 후회가 남는다는 건 심리적으로 꽤나 압박이 느껴진다.

글에 실린 무게도 가볍고, 보는 사람도 몇 되지 않는 이런 짤막한 토막글조차 그럴지언데 자신의 글이 실물이 되어 세상으로 널리 퍼지는 기성 작가들은 어떠한 심정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을까?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굳이 직업의 구분을 두지 않더라도 글을 쓰고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미완의 작품을(이런 허섭 한 글도 넓은 범위에서 작품이라 할 수 있다면) 내놓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나보다. 그러한 숙명을 나의 성장의 증표로 삼고 자신의 과거의 흔적에 대한 부끄러움을 견뎌내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만이 ''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부여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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