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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Jan 20. 2023

'누칼협'과 '열정페이'

가뜩이나 힘든 세상 도우면서 살았으면...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과 실제 겪어 보는 것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요즈음이다.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일을 선택하는 데 있어 개인적으로 중요하다 믿는 바는 여전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했을 때 문득문득 답답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 현실적인 문제는 당연히 대부분 '돈'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일도 그렇겠지만 번역 일도 정말이지 실력 있고 경력 있는 소수가 아니고서는 하는 일에 비해 제대로 된 수가를 얻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여기에는 줄어드는 수요로 인한 요인도 물론 있겠지만 일을 할수록 번역가가 하는 일에 비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 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데, 산업 전반적으로 왜 이렇게 요율이 낮고 더 상승하지 않는지는 조금 더 이쪽에서 보고 들으면서 경험을 해봐야 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물가에 비해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유지 중인 소득 수준에 벌벌 떨며, 이번에는 시장에서의 '열정페이'와 일명 '누칼협'으로 대변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경제성 = 이익



인간은 누구나 경제성을 추구한다.


언어에도, 생각에서도, 일에서도 심지어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기대한다. 물론 특정 상황에서 개개인의 선택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집단의 선택이 사회의 방향성을 결정한다면, 그 길은 언제나 최소의 노력을 통한 최대의 결과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현상을 보면 구직 시장에서 가성비 좋은 신입을 추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언뜻 보면 노동자 역시 더 좋은 근무 조건의 회사를 들어가기 원하니 상호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듯 대등해 보이는 관계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건 우리가 경험적으로 모두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 노동자는 언제나 대부분 '을'에 위치에 있었기에 노동자가 주도해서 가격을 결정한 적은 거의 없을뿐더러, 있었다 해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노동시장에서는 언제나 고용주의 경제성이 우선적으로 고려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성의 다른 말은 바로 '자기 이익'이다.


그렇다 시장은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정면으로 부딪히며 가격을 형성하고 가치를 교환하는 곳이다.





열정페이



그런데 얼마 전 꽤 흥미를 끄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 여가수가 운영하는 쇼핑몰에서 올린 구인광고가 화제가 된 것이었다.

그 구인 광고는 바로 쇼핑몰의 디자인부터 상품 기획, 주문 관리 등의 전반적인 업무를 관리하는 3~5년 차의 CS 경력직 인력을 구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그 광고가 화제가 된 건 바로 금액이었다. 넓은 영역에 있어 숙련된 업무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연봉 2500만 원이라는 조건을 내세운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본 사람들은 분노하며 그 연예인을 비방하기 시작했고, 결국 해당 연예인은 담당자 착오로 인한 실수였음을 밝히며 사과문과 함께 연봉을 2500에서 3000으로 수정한 공고문을 다시 올리기로 약속한다.


사람들은 왜 이 사건을 두고 크게 분노했을까?

그들의 이익이 걸린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사회이니 고용주가 얼마를 내걸든 개인의 자유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여론은 노동시장의 자유시장경제 원리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사회주의적인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누칼협



2022년을 강타한 신조어 중 '누칼협'이 있다. 그 속 뜻을 살펴보면 '누가 그 일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의 준말이다.


이 말은 일견 타당해 보일 수 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선택에 누구의 강요도 없었으니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신조어는 공무원 일자리의 처우가 전만큼 만족스럽지 못하게 되며 나타난 불만의 목소리를 비난하며 나타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안정한 현실에서 미래 안정성만 바라보고 몇 년 동안 밤낮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겨우 공무원이 되었는데, 처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충분히 화가 날 법하다. 그렇다고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이제 와 쉽게 다른 일로 옮기자니 그것도 쉽지가 않다. 최선의 선택을 하고 어렵게 목표를 이뤘건만 현실이 녹록지 않으니 볼멘소리가 나올 만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일부 집단의 불만을 들어줄 마음이 없다.


여유가 없는 건지 타인의 불만을 들어주고 싶지 않은 건지, 처우 개선을 외치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단호하게 '누칼협'을 말하며 스스로가 개인의 선택에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참 냉철하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다.


누칼협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은, 개인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시대적인 주류에 있다는 반증이다. 그럴 수도 있다. 전체의 이익만큼이나 개인의 이익 또한 중요하다 생각하기에 여기에 대한 이견은 특별히 없다. 또한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집단주의적 문화 속에서 개인보다는 집단을 우선시해왔기에 그러한 배경에서 더 이상 개인의 희생을 수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클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이익 또한 중요하다는 말의 뜻이 결코 타인의 손해를 간과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 손해는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사회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에서 타인이 입은 피해는 결과적으로 나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온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모 연예인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불특정 다수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했을 때 모두가 분노하고 이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보다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강요받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관대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더 확산되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한다면 결국 나에게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나를 위해 나서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안 그래도 힘든 이 세상에서 조금은 온기를 느끼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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