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an Lee Mar 14. 2017

그들의 오래된 미래에 대하여

소설 <고발> 서평



내가 '부조리' 라는 말을 처음 들은건 학창시절이었다. 그때 그것은 내게 호기심을 느낄 겨를 없이 교과서 귀퉁이에 적어놓고는 화학시간의 원소기호처럼 암기해야 할 용어에 불과했다. 그 보다 몇 해 전 느꼈던 사춘기때의 좌절감이나, 그 보다 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의 차별대우,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돈을 못번다는 내가 좋아했던 오빠들을 보며 느낀 분노 등이 모두 어쩌면 '부조리' 였으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그냥 나쁜 것이었다.


나의 북한에 대한 오래된 시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공교육이나 교련이 정식과목으로 채택되어있던 세대는 아니었지만 그 잔재 속에서 살아왔기에,(어릴적 가족여행 중 반공소년 이승복 기념관을 다녀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북한' 그 자체는 존재만으로도 나쁜 혹은 옳지 않은 것을 뜻하곤 했다. 그러다 직, 간접적으로 살에 닿는 부조리를 겪으며 그것은 느껴질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단어임을 깨달을 무렵, 나의 북한에 대한 시선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체제 속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를테면 기계처럼 '대홍단감자'를 부르며 율동하는 아이, 엄청난 인원이 긴 시간을 투자해서 준비했지만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은 1호행사를 소재로 한 외국다큐, ebs 다큐 <탈북> 등을 통해 나는 국가와 사회가 주는 부조리를 업보마냥 지고 살아가야 하는 북한 사람들을 향해 연민을 느끼곤 했다.


<고발>은 그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책이다.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그를 둘러싼 '제국'만을 찬양해야 하는 태생적 소명에 반하여 쓰고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본 책이다. 작가는 하나의 긴 서사를 통해 오랜시간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을 설명하는 대신, 여러가지의 짧고 굵은 이야기를 통해 실제 글이 쓰여졌던 90년대 초 부터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을 북한 인민들의 일그러진 일상을 생생하게 서술했다. 생생한 표현과 강렬한 문체는 각 이야기가 지닌 명확한 주제의식을 전달한다. 심지어 혹여 짐작도 못할 정도로 다르기에 깨닫지 못할 것을 배려라도 하듯 각 작품 말미에는 전지적 서술, 혹은 등장인물간의 대화를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세지를 터뜨린다.


아니, 그런 의미의 말이 아니라 이건 자네에게만 하는 나의 고발이네

하지만 주제가 분명해서 뇌리에 박힐수록, 이상하리만치 우리의 어제와 오늘이 느껴진다. 등장인물간의 갈등과 그들이 느끼는 부조리에 함께 분노를 느끼며 안타까움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남은 여백으로 어딘가 씁쓸함이 찾아든다. <준마의 일생>으로부터는 정년과 함께 찾아오는 허무함을 감출 길 없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복마전>,<무대>로 부터는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괜찮은 척' 해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는 무엇인가를 지키고 숨기기 위해 누군가의 삶 자체를 파괴해버리는<붉은버섯>을 통해서는 오랜시간 꽃피우지 못하고 억울하게 떠난 많은 넋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이야기들을 우리의 사라지지 않은 억압과 부조리함으로 치환해버린 채 책을 덮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당연하게 누리고 살아가는 많은 것들이 그들에겐 어떠한 몸부림으로도 쟁취할 수 없는 것들이며, 그로 인해 자유의지란 없이 체제에 무기력하게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탈북은 그 가운데 삶의 마지막과 맞바꾸는 최후의 선택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은 <탈북기>를 통해 많은 북한사람들이 탈출을 생각하고 있음을,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들을 통해 독자들은 좀처럼 떠올릴 수 없었던 '탈출'의 구체적인 이유를 풀어내는 책일지도 모른다.


하나 이렇게 살아 고뇌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죽어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낫겠기에 목숨을 내대야 하는 탈출 방법도 서슴없이 선택한 우리들이네.


줄곧 북한에 대한 모두의 관심은 그 땅에 살고 있는 대다수가 아닌, 그들의 굽은 허리 위에 제단을 올리고 선 극소수로 집중되곤 했다.  그 소수는 기상천외한 일을 일으키며 의도적으로 외부인의 관심을 그들 자신에게로 돌렸고, 지금도 그들의 만행은 잊을만 하면 우리의 매체 1면을 장식한다. 그러는 동안 대다수는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금도 안간힘을 쓰고 견디고 있다. 그 어떠한 자유도 갖지 못한 채 고립된채로. 결식아동, 내전난민, 여성인권 등 우리는 이미 유념해야 할 존재들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가운데에서 자신들을 잊지 않기를 청하며 내미는 그들의 거친 손이다. 부디 많은 이들이 읽어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없이 깊은 사람들을 위한 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