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은 모든 인류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행위이며 그와 동시에 가장 무겁고 좌절을 안겨주는 행위다. 우리 안의 인간애를 온전하게 깨닫게 하는 실존적 행위이기도 하다. 돌봄의 미천한 순간들, 즉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고 더러워진 시트를 깔고 짜증을 달래고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볼에 키스할 때 내 안의 가장 훌륭한 나의 모습이 구현된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에게도 일종의 구원이 찾아온다.
…
가장 지독한 조건의 돌봄에서도 돌봄은 상호적이다.
아서 클라인먼, <케어>
2021.01.14.
엄마가 두 번째 항암을 받았다. 요즘은 엄마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너무 좋다. 아름답다. 엄마의 손발을 만지고 주무르는 순간이 행복하다. 이렇게 애틋할 수 없다.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내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까지 전해진다. 나의 생명에 감사한다. 이런 나의 삶을, 이 운명을 사랑한다.
사실 엄마가 약을 바꾸고 이제는 기어코 머리에 바늘을 꽂아 항암약을 흘려 넣어야 한다는 것을 잘 받아들일 수는 있을지, 엄마가 갓 마흔 정도의 나이일 때 암과 싸우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던 기억이 남아 더 아프고 두렵지는 않을지, 새로운 약이 엄마를 더 괴롭게 하지는 않을지 많이 두렵고 걱정이 된다. 약이 들어가는 순간에도, 심지어는 약통을 들고 걸어 들어오는 의사의 숨결에까지도 기도의 마음을 담는다. 엄마가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엄마가 부디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엄마의 말간 얼굴과 조금이라도 힘이 담긴 목소리는, 밥을 잘 떠먹는 입은 또 얼마나 고마운지. 나는 얼마나 감동하는지. 나란히 명상을 하고는 씻고 나왔는데 그새 책상에 앉아 성경책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눈물 나게 감탄했다. 그러다 또 "에이, 나 좀 눈 아프고 머리 아파."라면서 벌렁 누울지도 모르지. 엄마에게 배운다. 삶은 이렇게 사는 거라고. 이렇게 용감하고 담대하게, 문득 예상치 못한 바람이 불어도 포기 않고 이렇게 당차게 살아가는 거라고. 일단 하는 데까지 다해보고 안되면 어쩔 수 없지 뭐, 하는 깡다구로. 그 어떤 미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배포로.
보호자는 병마 앞에 자주 무력하지만 그럼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런 엄마 딸이라 나 또한 오늘도 용기를 낸다.
2021.01.21.
동료 환우에게 추천받은 다큐멘터리를 드디어 다 보았다. 모두 이해되지는 않지만 여러 번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외에 그 무엇이라도. 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모두가 그런 마음을 품고, 어떤 사람은 실행을 하고, 그러다 누군가는 기적을 만나기도 하나 봐. 기도를 하면서라든지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적인 어떤 광경을 보면서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이제는 이해한다. 그 절절한 마음을 간절한 바람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성이나 사실 여부 같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9월 깨에 뇌척수라는 무서운 전이가 새로 발견되고 항암약을 바꿨던 엄마는 결국 네 달을 넘기지 못하고 새로운 수술과 새로운 항암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전이를 진단받으며 들었던 세 달의 여명은 이미 넘겼다는 사실이 위안이 될 리가 없었다. 머리를 열어 장치를 삽입하고 그를 통해 주사하는 약물을 온몸으로 흘려보내는 끔찍한 항암이 시작됐다. 수술로 볼록해진 엄마 한쪽 머리는 잔디인형처럼 까까가 되었고 일주일에 두 번씩 엄마는 이마에 두꺼운 바늘을 찔러야 했다. 그래도 예뻤어. 우리는 매일 눈을 마주 보며 희망을 말했다. 엄마 이거 너무 힘드니까 몇 번만 하고 끝내버리자고 자꾸 부비고 귓속말을 했다. 항암약이 들어가는 사이에도 엄마 침대 켠에 앉아 엄마 다리를 주무르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의 머리부터 온몸을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웠다. 나쁜 놈들 다들 나가라고. 이제 그만 꺼져달라고. 우리는 그렇게 내일을 맞이할 힘을 주고받았다. 먹먹한 마음을 안고 그럼에도 소중한 조각조각들을 찾아가면서, 서로의 모습에 감탄하고 감동하면서 삶을 배워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오늘에 감사하고 내 운명을 사랑하며 소중한 사람들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