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어쩌면 내일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오직 오늘이 전부인 것처럼

by 수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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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걷고 있는 엄마.


2020.03.07.

내 몸이 이렇게 된 마당에 좋은 것도 있는데

그 이후 처음으로 엄마가 나 없이 혼자 밖에 나서서 산책을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뭔가 걸음마 뗀 딸내미를 보는 기분이랄까

엄마가 단지 안을 찬찬히 조심조심 걷는데 조마조마 두근거리면서도 괜히 심장이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 많이 좋아졌구나.

이렇게 많이 나아서 건강하게 나랑 많이 놀러 다니자.

내가 정말 정말 재미있게 편안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잘해줄게 사랑해


2020.07.24.

어쩌면 비가 올 수도 있겠다는 짐작은 '호우주의보'라는 확신이 되었고 그럼에도 우리는 강행하기로 했다. '그 언젠가'라는 시간은 '영원히' 이루지 못할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제 너무나 잘 알아버린 우리는 오늘의 행복을 아껴두지 않기로 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떠났고, 또 이렇게 새로운 추억들을 새겨 안고 무사히 돌아왔다. 엄마 고마워.


2020.08.14.

별 일도 없이 평범한 하루. 그 단조로움이 얼마나 평화로운 것인지, 그 평범이 얼마나 비범했는지를 이제 안다. 그런 하루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바삐 움직이고 있나. 그런 우리의 하루는 얼마나 귀한가.

어쩔 도리가 없는 일들은 어쩔 도리 없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앞에 나는 언제나 무력하다. 허나 그를 대하는 태도에 오히려 더 중대한 게 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들을 겪어내는 방법을 배워가는 건가 봐.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잘 겪어내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연습을 한다. 아무리 연습해도 어려울 그런 준비를 하듯 사실 나는 자꾸 마음을 가지런히 맨다. 어쩌면 하루를 온통 그렇게 쓰고 있다. 참 아름답고 정말이지 귀한데 자주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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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하는 우리는 공기 좋고 아름다운 곳으로 자주 떠났다. 한 시간, 두 시간, 엄마의 컨디션에 따라 이동 거리가 정해졌다. 언제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우리를 항상 용감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행복을 유보하지 않고 조금 더 행동하고 좋은 시간을 만드는 데 애쓰는 날들이었다. 엄마는 많이 웃었고 우리는 틈 없이 애틋했다.


그동안 엄마는 몇 번의 입원을 했고, 몸 이곳저곳에 몇 차례 방사선 치료를 했다. 그 가운데, 머리에 고선량을 쏘아야 했을 때는 이마 양쪽에 커다란 드라이버 모양의 나사를 박기도 했다. (정말 보기 힘들었는데 엄마는 잘 버텨주었다. 셀카 찍더니 친구한테 보냄. 나 괴물 같지? 이러면서. 아 너무 귀여워….) 등허리 뼈에 무시무시한 바늘을 꽂을 때는 오히려 겁에 질려 덜덜덜덜 떠는 언니를 위로했다. 엄마는 여전히 엄마였다. 지독한 항암약 부작용은 두피부터 손발톱, 잇몸과 혀, 엄마의 얼굴과 몸의 피부를 여기저기 훑고 다녔다. 두피가 온통 진물 딱지로 뒤덮인 엄마는 미용실을 갈 수 없게 되었고 짓무른 손톱은 생활 전반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점막이 상해 매운 입 속에 고춧가루도, 그 좋아하던 새콤한 과일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3개월 진료 주기는 1개월이 되었다가 2개월이 되었다가 했고, 응급실도 어느새 조금 익숙한 공간이 되었다.


건강하게 먹기, 건강을 위해 운동하기, 시간 맞춰 약을 챙기고 최적의 잠을 챙겨 자기. 컨디션을 관리하며 회복을 하다 또 어딘가에 변화가 생기면 다시 새로운 치료를 하고 다른 약을 먹고. 희망과 절망이 되풀이되는 사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단순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에 감사하고 내일의 빛을 이야기했지만 어느 때는 고요한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전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우리 모두 힘들었던 궂은 여름. 유난히 길고 긴 장마에 외출도 어렵고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도 한계가 있었다. 증상을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지만 분명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보름이 넘어가고, 걱정이다가 답답하다가 힘들다가 괴롭다가 하면서 나는 우리가 이대로 지쳐버릴까 두려웠다. 그렇게 지난한 여름을 보내며 그저 살아남는 것 그 이상의 목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즈음 엄마에게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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