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안 와서 핸드폰을 켰다. 인스타그램 릴스를 무심히 넘기다가 가자지구의 영상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흙먼지 뒤집어쓴 아이가 카메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2초쯤 들여다보다가 엄지손가락을 위로 쓸었다. 다음 릴스는 고양이 영상이었고, 나는 웃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방금 내가 무엇을 한 건지.
사람이 죽어가는 화면과 고양이 화면 사이의 거리가 엄지 한 번이라는 사실에, 정작 제일 당혹스러운 건 당혹스러워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여자의 일생>에 등장하는 기쿠와 사치코는 투사가 아니다. 교리를 논하지도, 대의명분을 외치지도 않는다. 그냥 나약하고 평범한 여자들이다. 에도 막부의 기독교 탄압 속에서 기쿠는 신학을 몰랐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겠다는 한 가지 마음으로 자기 전부를 내던졌을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속 사치코도 마찬가지였다. 국가가 ‘숭고한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청년들을 사지에 밀어 넣을 때, 사치코는 잿더미 거리에서 국가의 명령 대신 병자와 고아를 택했다.
세상의 기준으로 이 여자들의 삶은 초라하다. 전쟁과 국가라는 압도적 폭력 앞에서 한 사람의 손을 잡는 행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우슈비츠에서 타인을 대신해 굶어 죽기를 자처한 콜베 신부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결국 그 수용소는 해방될 때까지 돌아갔고, 콜베 신부의 죽음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지는 못했다.
나는 이 ‘미련한 사람들’의 이야기 앞에서 자꾸 멈춘다. 그들이 세상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다. 폭력과 증오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그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한 사람을 향한 미련하고 지독한 사랑이 무력한 게 아니라 유일하게 진짜라고 묵묵히 말한다.
뉴스는 늘 국가 안보, 영토 분쟁, 세력 균형 같은 단어로 전쟁을 해설한다. 우크라이나의 무너진 아파트,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를 오가는 미사일.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말이 움직이듯 전황이 중계되는 동안, 정작 피를 흘리고 내일을 잃어버리는 건 우리와 똑같이 밥을 먹고 출근을 하던 보통 사람들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안다’. 안다와 느낀다 사이가 이토록 멀다는 점까지도, 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말하는 ‘샬롬’은 총소리가 멈춘 조용한 상태가 아니다. 모든 관계가 안전하고, 정의롭고, 서로에게 ‘안녕하냐’고 물을 수 있는 적극적인 평화다. 지금 그곳의 하늘 아래에서 이 샬롬은 철저히 박살 났다.
폭격이 한창이던 3월 5일, 백악관 집무실에서는 스무 명 남짓한 복음주의 목사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었다. 대통령은 레졸루트 데스크에 앉아 눈을 감았고, 목사들은 그의 어깨와 등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군대의 보호를 위해, 대통령에게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백악관은 이 장면을 직접 촬영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같은 주에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이것은 종교 전쟁”이라고 했고,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을 “이슬람적 망상에 사로잡힌 미친 정권”이라 불렀다. 미군 지휘관들이 병사들에게 이 전쟁을 ‘성전’으로 프레이밍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나는 같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이 장면을 봤다. 폭격으로 천 명 넘게 죽어가는 와중에 신의 이름으로 승리를 비는 기도라니. 그 기도가 끝나고 목사들이 아멘을 외치는 동안에도 테헤란에는 미사일이 떨어지고 있었다. 신은 그 집무실 안에 계셨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은 승리하는 강대국의 미사일 위에 계시지 않다. 폭격의 잔해 속에서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들 곁에, 철저히 상처받은 모습으로 함께 계신다. 적어도 내가 읽은 복음서의 신은 그랬다.(나는 그 신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아까 그 아이의 눈을 2초 만에 스크롤해 넘겼다. 이 간극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미사일의 궤도를 내가 바꿀 수는 없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 하나 뭘 해도 소용없다’는 문장이 너무 편리한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통계와 숫자로 사람을 지워버리는 거대 서사에 매몰되지 않을 수는 있다. 기쿠와 사치코가 그랬듯, 내가 발 딛고 선 자리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다. 아마도.
예배 시간에 ‘세계 평화’라는 막연한 단어 대신, 난민촌의 아이와 징집을 거부한 청년의 구체적인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한다. 생명을 살리는 구호 단체에 커피 한두 잔 값을 매달 보내며 지갑으로 연대한다. 혐오와 배척의 말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내 주변의 약자에게 먼저 말을 건다.(쓰고 보니 전부 엄지손가락 하나로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아까 그 2초의 스크롤도 엄지손가락이었다.)
거대 서사 대신 한 사람의 생명을 끝까지 안는다. 세상의 눈에는 미련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작고 투박한 연대 속에서 폭력을 넘어서는 샬롬은 다시 시작된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믿고 싶다는 말은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자의 일생>의 기쿠와 사치코도 확신이 있어서 손을 내민 게 아니었다. 그냥 내밀었다. 그래서 나도, 일단 내일 아침 그 릴스 앞에서 2초가 아니라 조금 더 멈춰보려 한다. 세상을 멈출 수는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