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는 엡스타인이 없다

대신 그도 부러워할 무언가는 있다

by 유유히유영

미국에는 제프리 엡스타인이 있었다. 억만장자, 사교계의 총아, 미성년자 성매매범 등이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다. 그의 곁에는 길레인 맥스웰이 존재했다. 소녀들을 찾아내고, 길들이고, 직접 가담까지 한 여성이었다. 둘은 부와 인맥이라는 전신갑주를 입고, 수십 년간 범죄를 이어갔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제프리 엡스타인: 괴물이 된 억만장자’(2020)는 이 범죄의 윤곽을 드러냈다. 엡스타인이 마이애미 팜비치에 있는 저택에서 ‘성착취 피라미드’를 어떻게 운영했는지, 경찰이 증거를 쌓아가는데도 처벌이 왜 미뤄졌는지 추적한 결과를 4부작 다큐로 제작했다.


후속작 ‘길레인 맥스웰: 괴물이 된 사교계 명사’(2022)에서는 이런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굴린 사람을 조명했다. 이 다큐를 보면서 계속 토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피해자들은 맥스웰이 엡스타인보다 더 나쁘다고 증언했다.

엡스타인과 길레인

두 편의 다큐를 보고 나면 한 가지가 선명해진다. 엡스타인 혼자서는 이 범죄를 지속할 수 없었다. 맥스웰은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하나는 피해자를 직접 물색하고 데려왔다. 예술학교에 기부금을 내며, “넌 특별해”라고 속삭였고 소녀들의 신뢰를 얻은 뒤 엡스타인에게 넘겼다.


다른 하나는 범죄가 지속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사교계 명사라는 지위가 범죄에 정당성의 외피를 씌웠고, 주변의 의심을 차단했다. 이 두 번째 역할이 어쩌면 더 치명적이었다. 피해자를 데려오는 건 다른 누군가도 할 수 있지만, 시스템을 유지하는 힘은 쉽게 대체하기 어렵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자꾸 한국교회가 떠오르는 기분 나쁜 경험을 했다. 좋지 않은 기분으로 키보드 앞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남의 나라 범죄인데, 왜 이렇게 익숙한 구조일까. 어디서 본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다.

트럼프 대통령과 엡스타인. 두 사람이 영화 타이타닉에 나온 포즈를 취하는 듯한 동상이 워싱턴 DC에 퍼포먼스로 세워진 적이 있다. 그림 나노바나나

한국교회를 들여다보면, 이상한 구석이 있다. 엡스타인은 한 명이었는데, 한국교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목회자는 10년간 259명, 피해자 529명이다. 기독교반성폭력센터가 7년간 접수한 사건 385건에 피해자는 472명이 넘었다. 엡스타인이 이 숫자를 봤다면 부러워했을 거다.(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역겹다.)


엡스타인에게는 사유지, 마이애미 팜비치에 있는 ‘리틀 세인트 제임스’가 있었다. 한국 목사들에게는 교회가 있다. 섬보다 훨씬 접근성이 좋다. 전국 어디에나 있고, 매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온다.


엡스타인이 돈으로 피해자를 유인했다면, 목사들은 “내 말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하면 된다. 투자 비용은 제로이고, 수익률 무한대다. 엡스타인의 비즈니스 모델이 한참 뒤처진다.


맥스웰 역할을 하는 시스템


한국교회의 맥스웰은 누구인가. 한국교회에는 맥스웰 같은 개인이 없다. 대신 맥스웰의 기능이 시스템 전체에 퍼져 있다. 맥스웰의 첫 번째 역할, 피해자를 직접 모집하는 일은 가해 목사 본인이 한다. 심방, 안수기도, 개인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 따르면 교회 성폭력의 71%는 목회자가 가해한다. 피해가 반복되는 비율도 36.8%에 달한다. 심방이나 안수기도처럼 목회적 접촉 안에서 벌어지니, 피해자 스스로 그것을 폭력이라 인식하기까지 오래 걸린다. 엡스타인은 수십억을 들여 구축한 신뢰를, 목사는 안수받는 순간 장착한다.


맥스웰의 두 번째 역할, 범죄가 지속되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문제가 터져도 덮는 일은 누가 하는가. 노회가 한다. 교단 재판국이 한다. “목사도 사람이니 용서하자”고 말하는 교인들이 한다.


2024년 교단에 징계를 요구한 8건 중 실제 징계로 이어진 건 3건뿐이었다. 나머지 가해자는 슬쩍 사임하거나 교단을 빠져나갔다. 어떤 목사는 성추행을 인정하고 사임한 뒤, 다른 동네에 교회를 새로 열었더니 천여 명이 등록했다. 맥스웰은 한 명이 두 역할을 다 했지만, 한국교회에서는 구조 자체가 맥스웰을 연기한다.

한국교회에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성범죄를 저지른 목회자를 감싸는 남성 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림 나노바나나

다른 지점도 있다. 엡스타인 사건 이후 미국은 적어도 분노했다. 투명성법을 만들었고, 수백만 건의 수사 기록을 공개했으며, 맥스웰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불완전하고 정치적이긴 해도,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넷플릭스 다큐가 2025년 말 엡스타인 파일 공개 이후 80개국 넘는 톱 10에 재진입했다. 사람들이 아직 이 사건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고, 잊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분노 대신 침묵을 택한다. 다음은 뉴스앤조이가 2025년 3월 11일에 보도한 내용이다.


“기독교반성폭력센터가 발표한 '2024년 상담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센터가 신규 접수한 사건은 42건으로, 2022년 38건, 2023년 44건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수치였다. 피해자는 70명으로 지난해 69명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전체 42건 중 37건(88%)은 피해자가 1명이었지만,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도 5건이었다. 피해자가 22명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결과에도 교단은 “개인의 일탈”이라 규정하고 넘어간다. 피해자가 입을 열면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구절이 방패처럼 올라온다. 성경을 가해자의 변호인으로 쓰는 나라가 있을까. 아니, 보통 범죄를 비호할 때 쓰인다. 맥스웰의 재판에서 변호인이 증언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했다.


한국교회에는 엡스타인이 없다. 한 명의 거대한 악인 대신, 구조가 악인을 양산한다. 위계가 입을 틀어막고, 거룩함이 범죄를 위장하며, 공동체가 은폐에 동참한다. 엡스타인은 사람 이름이지만, 한국교회의 문제는 시스템에 있다. 공범 맥스웰은 감옥에서 사면을 구걸하고 있지만, 한국교회의 시스템은 사면을 구걸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을 기소조차 하지 않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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