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반려동물, 우주, 요리) 단편소설 by 유자까
“내려와라. 그러다 큰일 난다.”
선영은 반려묘 L에게 소리쳤다. 주방에 자주 서는 일도 없는데, 요리할 때면 L은 싱크대로 뛰어오른다. L을 사랑하지만, 이 일은 견딜 수 없다. L이 뿜어내는 털은 평범하게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도 언젠가 샐러드를 먹다 L의 털이 입술에 걸린 이후였던 것 같다. 음식을 준비할 때면 L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 선 것 말이다.
선영은 다시 소리치려다 말았다. 그리고 자주색 양상추를 썰던 도마 위로 눈물을 떨궜다. L은 없는데, L이 그곳에 뛰어오른 느낌이 너무 생생했다. 싱크대 위로 뛰어오를 L이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한 달이 지나가지만, 아직도 L과 지내던 습관이 남은 탓이다.
지난주에는 입에 들어갈까 걱정하던 L의 털을 침대 이불에서 발견했다. 이불을 붙잡고 한 시간을 울었는데, 오늘은 음식을 준비하면서 운다. L이 늘 올라가던 방석은 아직 치우지 못했다. 방석에는 선영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털이 여전히 가득한데. 도마 위에 야채를 그대로 두고, 방석에 기대어 운다.
사실 처음 L을 들인 날, 선영은 바로 후회했다. 생후 6개월 L은 밤새 울면서 선영을 괴롭혔다. 물에 닿는 것도 싫어해서 제대로 씻겨본 적도 없었다. 화장실 청소는 왜 그리 힘들던지. 그냥 예뻐서 들였지만, L은 마냥 예쁘기만 하지 않았다. L이 침대 위에서 자려고 하는 것도 사진으로 볼 때와 달리 침대에서 다른 생명과 잠들어 본 적 없던 선영을 힘들게 했다.
선영이 L에게 진짜 마음을 연 사건은 따로 있었다. 첫 직장에서 성추행을 당한 날이었다. 신입직원이 왔다고 마련한 회식자리에서, 팀장이란 자가 아무렇지 않게 허벅지를 만져댔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집에 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 누군가에게 호소하지도 못할 분노로 침대에서 눈물을 흘렸다.
L은 그런 선영에게 다가와 안겼다. 평소 주변에 잘 다가오지도 않던 L이었다. 선영은 L이 자신을 위로한다 느꼈고, 그날부터 L과 침대에서 함께 잤다. 이후, 그저 귀찮기만 했던 L과 지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 모두 즐겁게 느껴졌다. 그날을 생각하면 선영은 L이 늘 눕던 자리를 쓰다듬으며 침대에서 다시 울었다.
이 이상 울면 안 된다. 오늘은 약혼자 K와 함께 중미산 천문대에 가기로 약속했다. 잠이 오지 않던 밤, 우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L은 내 옆으로 와 함께 잠을 청하곤 했다. 밤마다 함께 우주로 떠나던 L을 우주가 가장 잘 보일 그곳에 뿌려주자고 K가 제안했다. 언제고 나와 함께 밤을 보내주던 L은, 나보다 먼저 진짜 우주를 만나고 있을까.
*notice
유유히유영은 유자까, 믹서, 멸종각 세 작가가 함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최근 세 작가는 한 주에 하루, 시간을 정해놓고(약 1시간 반) 같이 글쓰기를 합니다. 무작위로 적은 16개 단어 중 3개를 뽑아 관련 글을 작성해요. 형식은 자유입니다. 같은 키워드가 주어지지만, 각자 다른 느낌으로 글을 쓰기에 다양한 글이 나옵니다. 앞으로 매주 키워드 단편집에 이날 쓴 글들을 올리겠습니다. 다섯 번째 키워드는 '반려동물', '우주', '요리'입니다. 이번 글은 유명 작가를 꿈꾸지만, 글쓰기 자체에 만족한다고 말하는 속물, 유자까의 단편 소설입니다.